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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씨명필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아버지가 쓴 글씨는 어린 나를 충분히 감동을 주고도 남았다. 아름다운 그림 같았다. 한 글자, 한 글자, 내 가슴에 새겨졌다. 당신이 주로 글씨를 쓴 곳은 신문지였고, 볼펜으로 쓴 것이었다. 한글은 잘 쓰지 않았다. 대부분이 한자였다. 무슨 글자냐고 물어보면, 우리 가족의 이름과 현재 살고 있는 곳과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의 주소라고 했다. 가끔은 외우고 있는 한시도 적고는 했다. 반백 년도 더 지난,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일.  흑백사진 속의 풍경처럼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글씨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신문지에 쓰는 아버지의 한자를 보며, 나도 저렇게 한자를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피어나고 있었다. 적어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는 자주 그 글씨를 따라 쓰고 했던 기억이 소환된다. 말하자면 모방이었던 셈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나는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약간의 한자를 읽을 수도 있었고, 쓸 수도 있었다. 신문을 읽다가도 아버지에게 모르는 한자를 물으면, 그 글자의 음과 뜻을 일러주고, 내 어린 손을 잡은 채 쓰는 방법도 가르쳐주셨던 일도 추억으로 떠오른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의 글씨와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시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몇십 년 만에 아우가 직접 손으로 써서 건넨 쪽지를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이제 지천명인데, 내 글씨체를/ 변하지 않은 내 고유의 글씨체를/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니.// 결혼 후 떨어져 살았어도 형제의 숨결은/ 핏줄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서 허허로웠을 성장기에/ 나의 일상과 나의 습관이 적잖이 의지가 되었으리라./ 흠결 많은 내 청춘의 날들을 보상받는 듯하여/ 아우의 손을 꼭 쥐여주고 싶은// 그 순간,/ 아버지의 글씨체를 따라 쓰고 싶어 했던 내 어린 날의 추억이/ 불쑥, 불쑥, 소환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공동의 유산처럼 보존된 아우의 글씨체를 보고, 또 보았다.      인용 시는 시집 '사선은 둥근 생각을 품고 있다'(천년의 시작, 2021)에 수록된 '핏줄'이라는 제목의 작품 전문이다. 아버지의 글씨체를 따라 쓰고 싶어 했던 나. 그리고 내 글씨체를 따라 쓰며 자라난 아우. 이렇게 시에 나타난 세 부자의 글씨체는 서로 닮아 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글씨체로 확인되는 부자지간, 형제지간. 핏줄은 그렇게 얼굴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글씨체에서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신문지에 쓰던 아버지의 수많은 글자는 단순한 낙서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의 그 글씨들이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 그 이후로 나는 길을 가거나 책을 볼 때 한자로 된 것은 꼭 읽으려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한 번 보았거나 읽은 한자를 비교적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더불어 학창 시절에 한문에 해박한 선생님들께서 흑판에 분필로 한자를 또박또박 써주셨던 글씨체도 잊히지 않은 채 나를 성장시킨 가르침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내가 일본문학 번역가로 성장하는 바탕에도 아버지의 글씨가 자리 잡고 있다. 대기업에 재직할 때 여러 해 동안 한자시험 출제위원으로 활동했던 경력도 내게는 소중한 자산처럼 간직되어 있다.  이렇게 글자는 한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얼마든지 유효한 기능으로 작용한다. 좀 더 확대해서 얘기하면, 글자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 집단과 사회의 정서와 품격에도 건강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문서나 문장을 완성하는 데 대부분 손으로 글자를 쓰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앞으로도 이런 흐름이 지속된다면, 가족끼리도 서로의 글씨체를 모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연인끼리 애틋하게 손편지를 주고받던 이야기는 고전 속의 한 페이지로 남지 않을까 하는 우울함도 찾아온다.  얼마 전 친한 친구가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썼던 일기를 모아 '청춘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부모님과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서술로 가득하다. 손으로 쓴 일기나 편지의 향기가 짙게 배 있다.  이 계절이 가기 전에 손으로 무언가를 써 보자. 편지면 더 좋겠다. 손편지에 묻어 있는 그리움을 부치러 우체국으로 가자. 우체국 가는 길에 피어난 장미꽃들이 얼굴을 더 붉히리라. 지금은 여전히 아버지의 글씨가 사무치게 그리운 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청년은 전세대란이 무섭다“이사할 때마다 방이 좁아지네요.” 울산에서 올라와 서울살이를 하는 20대 후반 A씨가 한숨을 내쉬며 토로했다. A씨는 지난해 11월쯤 서울 관악구 일대에서 원룸을 겨우 구했다. 한창 전세난이 심할 때 발품을 팔았던 터라, 전에 살던 전셋집보다 1000만원 더 비싼 값에 계약했다. 돈을 더 들이고도 방은 외려 좁아졌다.  지난해 하반기, 전세난이 부동산 시장을 덮쳤다. 계약갱신청구권과 전월세상한제 등 세입자 보호를 위한다는 임대차2법이 시행되면서다. 가격 상승에 예외는 없었다. 아파트든, 빌라든, 혹은 오피스텔이든 상관없이 전셋값이 전방위적으로 고공행진했다. KB국민은행이나 부동산114 같은 민간 기업의 조사뿐만 아니라 한국부동산원과 같은 국가 기관의 통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조사 기관이 공개하는 그래프는 여전히 상승곡선을 그린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래프 경사가 가팔라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전세난은 현재 진행형이다. 수요자들이 체감하는 전세대란은 청년층일수록 더 심각하다. 전셋값은 수천만원씩 뛰는데, 이들이 마련할 수 있는 자금에는 한계가 있다. 최소 보증금으로 잡아도 1억원이 우스운 전셋방을 구하기 위해선 금융권 대출이 불가피하다. 대출이 나오지 않는 나머지 금액은 청년들이 마련해야 한다. 그간 사회생활을 하며 모아둔 예적금을 ‘영끌’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증금이 오르면 청년들의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제한된다. 전세 시세가 더 싼 곳으로 눈을 돌리거나 월세 내지 반전세 매물을 찾거나다.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주거비 지출을 최소화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월세나 반전세가 아닌 싼 전세를 찾아 이사를 가는 것이다. 경기 분당구에 거주하는 30대 초반 B씨는 이런 과정을 거치다 도심에서 외곽으로 밀려났다. “몇 달 뒤면 계약이 끝나는데 어디까지 벗어날지 모르겠다.” B씨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전세 시장에 섣불리 진입하지 못하고 부모와 함께 사는 30대도 상당하다. 주거 자립을 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가격 부담이 상당하다는 게 이들의 걱정이다. 독립은 포기하고 결혼 전까지 얹혀살겠다는 이들도 다수다. 대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전세난의 원인으로 공급 부족을 꼽는다. 이런 가운데 여당은 매매 시장 안정화를 명분 삼아 임대사업자 규제에 나섰다. 이 제도가 다주택자들의 투기 수단이 됐으니, 매물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여당은 건설임대는 유지하지만 매입임대는 신규 등록을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양도세 중과 배제 혜택은 등록 말소 후 6개월만 인정되고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 혜택은 의무 임대기간 이후 바로 없앤다. 민간 임대 공급을 책임지던 임대사업자들에게 매물을 빨리 팔라고 경고를 보낸 셈이다. 임대물량 처분은 전세 공급 감소로 이어진다. 매매 시장을 잡다가 전셋값에 다시 불을 붙이는 격이 될 수 있다. 두더지잡기식 규제는 또 다른 풍선효과를 낳는다. 부동산 시장은 4년 동안 그런 전철을 밟았다. 시장을 규제하고 통제하겠다는 발상은 통하지 않는다. 정책 부작용으로 충분히 입증이 됐다. 지금 필요한 건 정상적인 시장의 순환이다. 민간의 순기능을 인정하는 게 그 첫걸음이다. 시장은 악이 아니다.  김응열 기자 sealjjan11@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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