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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60여 년 훌쩍 뛰어 넘는 상상력의 힘
예술의전당 자유연극시리즈2 한국 근대 리얼리즘 명작선 <혈맥>
2013-05-22 09:33:00 2013-05-22 10:07:49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그렇다. 이성 중심이던 근대를 지나 '포스트모던'한 시대로 접어들자 연극을 만드는 방식도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탄탄한 구성, 극적 긴장감을 최고의 가치로 삼던 시기가 지나가고 다양한 경향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대가 됐다. 사회적 내면에 좀더 집중하기 위해 서사와 재현을 벗어 던지는 연극이 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연극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한 방향의 큰 줄기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례가 많다. 별다른 관점 없이, 시류에 따라 서사구조를 해체한 경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동시대적 형식을 띤 연극 모두가 어려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뚜렷한 목적 아래 서사구조를 해체한 경우, 잘 짜인 극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동시대인의 삶과 무의식을 건드릴 때가 있다.
 
이런 경우, 공연과는 별개로 소통의 성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바로 관극 방식이다. 이성과 논리를 떠나 몸의 세계에 주목할 때 쉽게 이해되고 마음에 다가오는 공연이 있다.
 
극단 성북동 비둘기는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동시대 형식의 연극을 만드는 집단 중 하나다. 해체·재구성이 주특기지만 대부분 명작을 토대로 작업하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기대고 갈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故) 김영수 작가의 1947년 작인 <혈맥>을 무대화한다는 소식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해방기 공간의 현실을 담은 근대 사실주의 희곡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알고보니 이번 공연이 처음도 아니다. 극단은 앞서 지난 2011년 1월 연극실험실 일상지하에서 <inn + dividual 혈맥>이란 이름으로 같은 희곡을 한 차례 다룬 바 있다.
 
<혈맥>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연출을 맡은 김현탁은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작품이 튼튼하고, 계속해서 흘러가는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만큼이나 공연은 확실한 길을 택했다. 김 연출은 김영수 작가처럼 도시 빈민의 삶을 그리되, 자기만의 방식대로 그린다. 원작에서는 핵심 가치관과 인물관계의 뼈대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해체·재구성한다.
 
원작 <혈맥>을 통해 김 연출이 담고자 했던 것은 역사의 거센 흐름에 휘청거리면서도 역사적 맥락을 떠나 살기 힘든 서민대중의 모습이다. 역사를 바라보는 김현탁 연출의 관점은 일차적으로 무대공간을 통해 노출된다. 김 연출은 공연은 원작의 방공호 공간을 버스 공간에, 역사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며 고통을 몸에 새기는 서민대중을 흔들리는 버스에 올라탄 승객에 비유했다. 김현탁에게 버스 승객이란 "이리저리 몸은 흔들리지만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무대 위는 사실적 묘사를 최대한 피한 모습이었다. 버스 공간임을 암시하는 것은 천정에서 내려온 손잡이 두 개뿐이다. 공연 중 복순이와 원팔이가 이 버스 손잡이를 잡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배우의 몸이다. 버스손잡이를 활용한 장면에서 이 공연의 새로운 형식논리가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딸을 기생으로 만들려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스타를 꿈 꾸는 복순과 행상으로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원팔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손잡이를 잡고 생존을 위해 몸을 가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손잡이를 잡 고 부들부들 떠는 배우의 모습자체가 그 어떤 설명적인 내용보다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는다.
 
버스 손잡이 외에 극 중 사용되는 오브제, 소리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김현탁 연출은 전작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이 공연에서도 오브제를 중의적으로 사용한다. 손바닥 만한 작은 나무 판은 상황에 따라 거울, 권리금, 문패로 활용된다. 컵라면은 자식을 유학 보낸 털보의 빈궁한 생활을 대변하다가도 어느새 술집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인 옥희의 구토로 의미를 바꾼다. 스타의 꿈을 꾸는 복순은 자신을 기생으로 만들려는 어머니 옥매를 보기만 해도 끌려가는 짐승처럼 우는데, 그 모습이 그 어떤 대사보다 가슴 절절하게 다가온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여러 오브제 중 우산이 등장하는 장면이 가장 동시대와 가까운, 구체적인 의미를 담는다. 아버지 털보와 아들 거북이의 말 싸움은 어느 순간 우산을 이용한 칼 싸움으로 변해가고, 그 위에 왜곡된 기계음이 배경음악으로 더해지며 마치 영화 <스타워즈>의 한 장면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급기야 털보가 스타워즈 속 유명한 영어 대사를 읊는 대목에 이르면 웃음이 터져 나오면서도, 자식을 유학 보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털보의 모습이 떠올라 마냥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 된다.
 
60여 년의 간극을 좁힌 것은 공연팀이 원작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도약대로 삼아 내용을 대담하게 해체·재구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작의 대부분을 가져오되 일부만 편의대로 바꾸는 방식보다 김현탁의 과감한 방식이 차라리 작가에게나 관객에게나 훨씬 덜 폭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무대 위에서 몸으로 겪어내는 극중 인물들의 모습은 그저 무대를 고정된 과거의 역사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는 세상이 여전히 해방기 공간의 현실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이끈다. 일부 배우들의 다소 어색한 대사처리와 사투리 사용을 제외하고 오브제와 몸 중심의 공연 내용 구성, 신체 중심의 연기방식에서 볼 때 <혈맥>과 동시대 관객 사이 심리적 간극은 굉장히 좁은 편이다.
 
작 김영수, 연출·각색·무대·의상·음악 김현탁, 출연 김정석, 오성택, 김미옥, 유진영, 최수빈, 최우성, 염순식, 이진성, 박문지, 이은주, 서윤식, 6월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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