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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형칼럼)'장보기 쇼', '오징어게임', 그리고 '큰 정치'
2022-01-13 09:24:35 2022-01-13 09:24:35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시나리오는 완성되고 13년간 서랍 속에 묻혀 있었다.
 
"당시 영화로 만들어보려 했을 때 낯설고 기괴하고 난해하다는 평이 많아 만들 수 없었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살벌한 서바이벌 이야기가 어울리는 세상이 됐고, 현실감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슬프게도 세상이 그렇게 바뀐 것이죠. "
 
드라마를 만든 황동혁 감독이 방송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제작조차 불투명했던 '오징어게임'은 그야말로 '신드롬'이 됐다. '앓이'라고 표현될 만큼 세계적으로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TV쇼. 그 비결에 대한 갖가지 분석이 쏟아졌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황 감독의 말 속에 있었다. '슬프게도 세상이 바뀐 것'.
 
10%와 나머지 90%가 사는 세상이 돼 버린 지금, '오징어게임'이 일종의 '현상'이 된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전세계인들의 '발버둥'을 드라마는 보여줬다. 공감의 전이는 단지 시간의 문제였을 뿐. 
 
우리도 그러하다. 아니, 더 오래 전부터, 더 적나라하게 체험중이다. 
 
지난해 발표된 국제 여론조사업체 입소스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 정책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는 우리가 현재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적확하게 보여준다. 전 세계 28개국 성인 2만3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세계에서 사회적 갈등이 가장 극심한 나라다. 
 
한국은 전체 12개 갈등 항목 중 7개 항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우선 한국인들은 10명 중 9명(87%)이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존재한다고 답했다.
 
또 빈부 갈등(91%), 남녀 갈등(80%), 세대 간 갈등(80%), 대졸자와 비대졸자 간 갈등(70%), 종교 간 갈등(78%)에서도 세계 1위였다. 사회 계층 간 갈등(87%), 도시와 농촌 간 갈등(58%), 대도시 엘리트와 노동자 간 갈등(78%) 등 3개 항목에서도 2~3위를 기록, 최상위권을 차지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갈등의 첨탑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사실을. 남북 분단이 존재하는 와중에 우리는 더 쪼개지고 갈라졌다.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갈등, 분열, 대립이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어디에도 치료제는 보이지 않는다. 몹쓸 중병이다.  
 
우리는 매일 그런 류의 뉴스를 소비한다. 그 중에서도 정치판이 으뜸이다. 내 탓은 없고, 남의 탓만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비난과 선동.  
 
대선 정국 '분열의 정치'는 그 덩치를 더 키운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느닷없이 멸공을 외치자 급기야 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 후보가 이를 따라하는 형국이다. 이건 익살도 아니고, 풍자는 더더욱 아니다. 
 
한 나라의 대선 후보가 이런 행위까지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는 커녕 오히려 키우고 있다니. 이것이 윤 후보의 정치인가. 내편 네편 가르고 약올리고 부추기는 것이 정치인가. 그래서 특정 세대나 계층의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말인가. '큰 정치'는 그런 치졸한 셈법을 하지 않는다. 
 
큰 정치는 관용의 정치다. 그것은 자신과 견해가 다르더라도 경청하고, 존중하고, 인정하는 정치다. 똘레랑스(tolérance)의 정치. 그런데 '장보기 쇼'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이래서는 상대방에게 존중을 기대할 수 없다. 존중받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2500년 전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지만 함께할 줄 알고, 소인은 같음을 강요하며 끼리끼리 놀 뿐 함께할 줄 모른다."
 
국민 갈등 치유와 통합은 우리의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대선 후보라면 이 사명을 정신 속에 깊이 새겨 그에 맞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엊그제 문재인 대통령은 "당연히 정치가 해냈어야 할 몫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고 자성했다.
 
장보기 쇼 따위로는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다. 제2, 제3의 오징어게임만 시작될 뿐이다. 국민들 대부분이 이번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 선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곧 국민들이 큰 정치를 하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는 열망의 또다른 표현일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지만 함께할 줄 아는 큰 정치가 그립다.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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