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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우리 안의 양자물리학
2023-09-21 06:00:00 2023-09-21 06:00:00
“인류는 아직 이걸 감당할 준비가 안됐어. 이건 신무기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일세. 세상은 준비되지 않았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가 된 오펜하이머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이 로스 앨러모스의 끔찍한 비밀(트리니티 실험)을 알게 되는 날 비로소 인류는 여태껏 보지 못한 평화를 가져올 거라고.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나? 원자폭탄이 핵억제력을 가져와 세상은 평화로워졌는가. 이 질문의 결론은 이미 알지만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인류가 그리고 세상이 감당해야 할 준비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세상이 추앙하는 ‘원자폭탄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그의 추락을 겨냥한 청문회를 거치면서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변호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과연 진실을 말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한번쯤은 우리도 비슷한 의문을 가진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과연 진실에 관심이 있는지를. 또한 진실은 누가 밝히는 것인지를. 법이 진실을 위한 잣대가 된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그동안 법은 자주 진실을 외면했다. 권력과 법이 너무 가까웠고, 여론을 호도하는 황색언론이 있었고, 그런 언론을 이용하는 법의 주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 진실은 무참히 은폐되고 왜곡되며 무너졌다. 그렇게 해서 결국 진실이 진실로써 드러났을 때 이미 대중의 관심은 진실의 여부에서 한참 멀어져 진실을 위해 싸워왔던 사람들의 긴 세월은 억울함과 허망함으로 채워지기 일쑤였다.
 
“세상이 자네를 충분히 고통스럽게 벌하고 나면, 언젠가 이 세상은 자네를 불러 성대한 연회를 개최할 걸세. (중략) 그러나 기억하게. 그 모든 것은 자네를 위한 게 아닐세. 그들이 자신들 스스로에게 베푸는 것이지.”
 
영화 속에서 아인슈타인이 오펜하이머에게 건넨 이 말은 드러난 진실조차 진실의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세상은 이토록 비정한 곳이지만 더 슬픈 사실은 우리가 그 비정함을 탓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전쟁이 난다. 전쟁의 명분에 순수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존엄으로서의 생명가치는 없다.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국민이 무기력해서다. 국민이 무지해서이며, 정치에 국민이 놀아나서이다. 언젠가부터 정치인은 팬덤을 가진 스타가 되었다. 정치인이 국민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을 선택하는 권한을 국민이 가져서인데 정치인이 뺏기도 전에 국민이 스스로 그 권리를 내팽개쳤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잘못을 질타하는 주체가 되기를 포기한 결과는 권력이 법 위에서 언제든 살상의 공간에 국민을 밀어넣을 수 있게 만든 작금의 세상이다.
 
“제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누가 원자폭탄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느냐입니다. 투하 명령을 내린 건 바로 납니다!”
 
오펜하이머의 고뇌와 소신은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한순간 나약한 과학자의 징징거림으로 치부됐지만 오늘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국민의 고뇌와 소신. 왜? 그것은 주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말이다. 
 
양자물리학은 ‘역설’을 포용하는 이론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양자물리학이라는 자연법칙이 인간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확실히 보여주었다. 원자폭탄을 만든 장본인이 그것의 사용을 저지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게 된 ‘모순’을 우리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처음의 질문, 인류가 그리고 세상이 감당해야 할 준비란 바로 이 모순이 우리 안에도 내재해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이제 무기력하고 무지하며 쉬이 조종당하는 우리들이 변화할 차례다.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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