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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와 아이들 유산 “K팝의 원형”
서태지 30주년 특별 기획 시리즈 #1
‘난 알아요’부터 ‘컴백홈’까지…“한국 음악계 패러다임 전환”
“90년대 랩댄스 대중화, 지금과 완벽한 단절 이뤄지지 않아”
K팝 열풍에 미국 음악 평론도 ‘서태지와 아이들’ 재조명
2022-03-14 00:00:00 2022-04-04 18:55:59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1992년 3월14일. 당시 MBC 간판 쇼 프로그램이던 ‘토토즐(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형형색색의 재킷을 입은 세 청년이 팔을 곧게 뻗는 일명 ‘회오리춤’으로 조용한 박수를 받고 내려갈 때, 세상은 알지 못했다. 이것이 나중에 어떤 파장으로 가 닿고, 어떤 소동과 소란을 야기할지.
 
이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 전개된 것은 순서대로다. 1집 앨범 발매(1992년 3월23일), ‘신호등 무대’(1992년 3월29일 KBS '토요 대행진‘ 빨강, 초록, 파랑 재킷 입고 출연), ‘7.8 방송’(1992년 4월11일 MBC TV ‘특종 TV 연예’ 출연 당시 선보인 ‘난 알아요’가 심사위원들로부터 혹평, 10점 만점에 7.8점을 받아 훗날 회자), 그리고 세상이 뒤집어질 것만 같던 대중의 반향....
 
서태지, ‘문화 대통령’ 서태지가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밴드 시나위 베이시스트 출신인 서태지는 양현석·이주노와 함께 결성한 서태지와아이들로 1992년 데뷔했다.(무대 기준 3월14일, 앨범 기준 3월23일) 당시 데뷔작은 한국어는 랩이 불가능하다는 편견을 깨고 힙합과 브레이크 댄스 대중화를 이뤄낸 역사적인 음반으로 평가된다. 
 
이후 매 앨범 발표 때마다, 장르를 변용하는 자가복제 거부로 한국 음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왔다.
 
서태지는 혁명이었다.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말한다는 것은 시대의 감각을 마주하는 일이며, 지난 30년 간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굴곡을 관통하는 것과 같다.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 방송가 사전제작 시스템 도입, 사운드의 선진화.... 보편적 담론에서는 오늘날 방탄소년단(BTS)을 필두로 세계를 휩쓰는 K팝의 뿌리이자 원형 모델로 평가되지만, 그것은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서태지는 수천수만 화학 작용이 결합된 미래다. 스스로는 “서태지 시대가 90년대에 끝났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90’S ICON(9집 앨범 ‘콰이어트 나이트‘ 수록곡)’에 박제되지 않는다. 자유, 도전, 창조라는 시대정신으로 무장한 서태지 세대들은 지금도 문화 현장 곳곳 창조의 꽃을 틔우는 ‘이날의 영웅들’로 성장했다. 세계는 여전히 회중시계를 지닌 토끼를 쫓듯 그의 ‘다음 음악’을 궁금해 한다. 슈퍼 하이웨이를 질주하는 몽롱하고 기나긴 단꿈처럼...
 
지난 2017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연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방탄소년단(BTS) 멤버들과 아이들 시절을 재현한 '문화대통령' 서태지. (사진=서태지컴퍼니 제공)
 
90년대 전후 음악 분기점, ‘난 알아요’의 혁명(1집 1992년 3월23일)
 
장중한 신디사이저 화성과 펑키한 컴퓨터 미디 샘플링, 묵직한 힙합 비트에 육중한 메탈 기타 리프까지 오르내리는 ‘서태지와아이들’ 정규 1집은 충격을 넘어 문화 혁명이었다.
 
오늘날 ‘댄스 랩’의 기원이 된 이 역작은 한국어가 랩이 불가능하다는 당대 편견을 엎고 세운 음악계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물 흐르듯 귀에 쏙쏙 꽂히는 멜로디, 언어의 당김음과 강세의 독특한 리듬감과 연결감은 단순히 가사를 음정의 고저 없이 읽는데 급급했던 기존 한국어 랩과 분명 차별화된 흐름이었다.
 
여기에 당시 첨단을 걷던 ‘아이들’의 패션과 브레이크 댄스가 서태지 음악과 화학적 결합을 일으키며 90년대 전과 후를 완벽하게 나눠주는 분기점의 역할을 했다.
 
‘난 알아요’에서 시작된 돌풍은 한국 음악 역사상 곡 전체가 랩으로 구성된 파격의 ‘환상 속의 그대’로 이어지며 태풍이 됐다. 댄서블한 리듬에 규칙적으로 목젖을 오르내리며 낱말을 각지게 끊어대는 묘한 래핑에 귀 기울이다보면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는 가슴 서늘한 자전적 가사가 뇌에 경종을 울려댔다.
 
미디 테크노 비트와 샘플을 근간에 두고, 미성 보컬과 부드러운 랩으로 빚어낸 R&B풍 발라드(‘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이 밤이 깊어가지만’)은 서태지 특유의 감성으로 현상을 뒷받침했다. 
 
치렁대던 긴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헤비메탈 베이스에서 컴퓨터 미디 악기로 손을 옮긴 이 실험적 20세 음악가의 신드롬이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달궜다. X세대는 ‘서태지키즈’의 이음동의어였고, 10대들은 대중문화의 주 소비층으로 급부상했다.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 등이 수록돼 오늘날 ‘댄스 랩’의 기원이 된 역작으로 꼽히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LP 커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랩·메탈·국악 삼중결합, 한국 대중음악 최초 밀리언셀러(2집 1993년 6월21일)
 
랩과 메탈, 국악을 뒤섞은 실험작 ‘하여가’가 음악계에 미친 파열음은 거대했다. 
 
테크노 미디 샘플과 펑크 브레이크 비트, 곡의 전체를 지배하는 메탈 기타 리프, 여기에 ‘너에게 모든 걸 뺏겨 버렸던’으로 시작되는 속사포 랩의 절경은 “‘난 알아요’보다 더 이상한 게 나왔다”는 평론가들의 담론을 끌어내기 충분했다.
 
50초가 넘는 기타솔로와 김덕수가 연주한 고음의 태평소, 업템포의 하이라이트 후렴구가 맞물려 일으킨 화학작용은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한국 대중음악의 새 가능성을 시도한 실험작이다. 초반 일각의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딛고도 이후 ‘하여가’가 수록된 2집은 한국 대중음악 최초 밀리언셀러(200만장)로 기록되게 된다.
 
마이클잭슨의 독특한 악곡에서 영감 받아 마약 중독자의 이야기를 그린 ‘죽음의 늪’, 팬덤 송 효시격인 유려한 선율의 ‘너에게’, 긴 영어 랩을 적극 도입한 ‘우리들만의 추억’, 158BPM으로 당시 국내 음악 중 가장 빨랐던 곡 ‘수시아’도 ‘이 작은 CD 한 장’의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행보 하나하나 파격이었다. ‘디데이(D-DAY)’가 다가오면 세상은 뒤집어질 것처럼 들썩거렸다. 양현석, 이주노의 레게머리나 앞머리 빨간색 브릿지를 넣은 서태지의 헤어스타일을 규제한 언론, 방송사와 갈등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돌연 잠적 뒤 돌아오는 ‘음반 제작-컴백’ 패턴은 이때 정립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 2집 발표 후 개최한 ‘93 마지막 축제’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커버.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교육과 통일 문제에 앞장 선 문화대통령(3집 1994년 8월13일)
 
동시대성을 겨눈 사회적 메시지는 3집을 기점으로 록 사운드 회귀와 맞물리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전 앨범까지 (연인 간) 이별을 다루던 주제는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에 들어서며 남북통일을 기치로 내세웠다. 나비 날개짓처럼 보이는 일명 ‘버터플라이 춤’을 철원 노동당사에서 선보인 뮤직비디오도 화제였다.  
 
청량하게 흩뿌려지는 느낌의 얼터너티브 록 기타 톤을 뼈대 삼아 이어붙인 동양적 음계의 멜로디 톤은 앨범 커버에 새겨진 새 날개처럼 자유롭게 비상할 듯 했다.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라 질문하고 ‘우린 몸을 반을 가른 채 현실 없이 살아갈 건가’라고 던진 의제는 전 세대에 걸쳐 평화와 화합에 대한 국민적 성찰로 번졌다.
 
교육 문제를 비판한 후속곡 ‘교실 이데아’는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같은 뾰족한 랩 가사 한줄 한줄이 데스·스래시 메탈의 금속성 사운드, 안흥찬(크래쉬)의 포효와 마찰을 일으키며 수면 아래 잠자던 교육 논쟁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10대들의 가수를 넘어 문화대통령이라는 수식어로 불리게 된 계기도 이 때문이지만, ‘교실이데아’를 거꾸로 들리면 ‘피가 모자라’가 들린다는 악마 소동 등 언론과 기성세대의 ‘서태지 죽이기’가 표출된 시기기도 하다.
 
3집부터는 외국 세션들을 대거 기용해 사운드의 완성도를 높였다. 마이클 잭슨, 핑크플로이드 로저 워터스 등의 앨범 작업에 참여한 기타리스트 팀 피어스, 스팅과 나인일치네일스 등의 앨범 참여로 유명한 드러머 조시 프리스, 세계적인 디제이 큐벗 등이 녹음 과정에 참여했다.
 
메탈 사운드로의 전향이 눈에 띄게 드러났지만, 자유롭고 재기발랄한 펑크 록 정신을 그린 ‘내 맘이야’와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이 돋보이는 발라드 ‘영원’, 차분하게 진행되다 후주에 가서 폭발하듯 다이나믹한 악곡전개가 돋보이는 ‘널 지우려 해’ 등 앨범은 전반적으로 다채로운 색깔로 완성됐다. 
 
서태지와 아이들 ‘92~96년 베스트’ LP에 담긴 3집 시절의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컴백홈, 시대유감, 그리고 굿바이(4집 1995년 10월5일)
 
갱스터 랩으로 미국적인 힙합에 도전한 ‘컴백 홈’은 사회 불씨를 다시금 지피기 시작했다.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어’,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자 이제 그 차가운 눈물은 닦고’... 둔중한 베이스 라인 위로 우리말 된소리를 끊어내는 엷고 쫀득한 목소리는 사회 벼랑 끝에 몰린 동시대 청년들의 기갈을 해소시켰다. 실제로 이 곡은 당대 가출 청소년들이 집으로 복귀하는 사회적 흐름을 만들며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상쾌하게 질주하는 얼터너티브 록 스타일의 또 다른 수록곡 ‘시대유감’은 음반 사전심의제도 폐지를 촉발시키기도 했다. 당시 공연윤리위원회가 가사에 반사회적 감정을 담았다는 이유로 방송 불가 판정을 내리면서다. 가사가 거세당한 채 연주곡만 실렸지만, 이 사건으로 서태지 팬덤을 중심으로 사전심의 폐지 운동이 일었고, 결국 1996년 제도 자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수순을 밟게 된다. 
 
서태지가 스스로 만든 곡 중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 곡이자 시각장애인의 애환을 담은 슬로우 템포의 얼터너티브 록 ‘슬픈 아픔’, 시나위 동료 김종서와 스노우보드 문화를 일으킨 ‘프리스타일’ 같은 수록곡들도 선풍적인 인기였지만, 노란 기타를 메고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트럭 위 깜짝 게릴라 공연까지 연 ‘필승’의 강렬한 이미지는 바로 어제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감각이었다. 
 
“지난 4년 간 활동을 마무리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1996년 1월31일, 4집을 끝으로 이들은 은퇴 선언을 한다. “새로운 음반을 만들어 내는 창작의 작업은 살을 에리고 뼈를 깍는 듯한 고통의 연속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10일여만에 내놓은  ‘굿바이 베스트 앨범’에는 4집 앨범 때 연주 버전만 공개된 ‘굿바이’ 가사 버전이 실려, 마지막 작별을 음악으로 대신했다.
 
갱스터 랩으로 미국적인 힙합에 도전한 ‘컴백 홈’ 활동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뉴시스)
 
서태지와아이들이 남긴 유산 “K팝의 원형” 
 
전문가들은 대체로 서태지와아이들이 남긴 ‘랩 댄스’ 유산이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이유로 데뷔 30주년의 의미를 짚는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11018 콘텐츠 본부장 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한국 음악사는 연대별 각 단계가 있었지만, 서태지와아이들 등장은 한국 음악사를 명확히 구분한 일종의 ‘선(線)’이었다”며 “2020년대인 지금과 그때 그어둔 90년대란 선은 완벽한 단절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이대화 음악 저널리스트(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는 “서태지와아이들 이전 소방차 같은 그룹도 있긴 했지만, ‘난 알아요’에서 촉발된 랩 댄스 대중화는 한국 주류 음악 역사를 앞뒤로 나눌 만한 거대 사건이었다”며 “그 이후 (서태지와아이들 만큼) 음악계에 드라마틱한 변화를 이끈 인물이 있었나 돌아보면 없었다고 본다”고 짚었다.
 
BTS를 필두로 세계로 확장 중인 오늘날 K팝 현상 역시 넓게 보면 서태지와아이들이 대중화시킨 랩 댄스 자장에서 발전되고 변모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김작가 평론가는 “지금 K팝이라 불리우는 한국 댄스음악에 원형 모델을 제시한 셈”이라며 “사전심의제도를 철폐시키며 사회적 영향력을 실천했던 ‘서태지 팬덤’조차 오늘날 아미(BTS 글로벌 팬덤)의 행보와 닮은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30년 전 서태지아이들의 데뷔는 현재진행형으로써 의미를 가진다”고 봤다.
 
이대화 저널리스트는 “댄스음악이 가요계에 완전 정착한 데는 서태지 공이 컸다”며 “이후 ‘일방통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H.O.T. 등 아이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고 정리했다.
 
서태지는 지난 2017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연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방탄소년단(BTS) 멤버들과 아이들 시절을 재현하며 “이제 너희들의 시대”라고 예지한 것도 두고두고 회자된다.
 
최근에는 미국 음악 평론에서도 되레 K팝의 기원을 찾아 ‘서태지와아이들’까지 거슬러오는 분위기다. 
 
지난 2020년 서태지와아이들 1집은 미국 음악 전문 웹진 ‘피치포크(1995년 창간)’으로부터 높은 별점을 받았다. 한국 발매 28년 만의 새삼스러운 조명인데다, 그간 깐깐하기로 자자한 이 매체로부터 평점 8.3점(10점 만점)을 받은 것이다. 8점 이상의 점수는 이 매체가 홈페이지에 리뷰를 따로 모아둘 정도로 높은 점수다.
 
노아 유(Noah Yoo) 기자는 당시 리뷰에서 “오늘날 방탄소년단까지 길게 이어진 K팝의 시초는 결국 서태지로 볼 수 있다”며 “개인 멤버들의 ‘셀프 프로듀싱’ 개념 도입과 사회 영향력을 행사하는 팬덤 등의 유산은 결국 서태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의의를 짚었다.
 
서태지 7집 'Issue' 활동 당시의 모습. (사진=뉴시스·서태지컴퍼니)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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