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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책임)고용세습은 권력사유화의 뒤틀린 흉내
2018-10-29 08:00:00 2018-10-29 11:17:02
공공기관과 공기업 등 공공부문에서 불거진 ‘친인척 채용 및 정규직화’ 논란에 싸늘한 시선이 많다. 사회적 맥락에서 보면 이번 논란은 사다리치우기, 수시 학종이나 로스쿨 등에서 드러나는 ‘불공정과 대물림’, 자산과 소득의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 청년취업난 등이 뒤엉킨 상황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이른바 ‘고용세습’은 ‘유치원비리’와 함께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사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출산의 원인 및 환경과도 연관돼 있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양적 비율을 둘러싼 논란보다 성찰이 이뤄져야 할 필요성이 크다.
 
5~6년 전에 우연히 지인의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어떤 대기업의 지방공장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몫을 대신해서 입사할 수 있는데 수천만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충 비슷한 시기인 것 같다. 2012년에 서울시설공단의 임원이 아들의 이력서를 인사담당자에게 건네고, 나중에 아들과 마주앉아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니 후자가 훨씬 근사한(?) 조건이다.
 
정부의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계획에 따르면, 1단계로 중앙부처 및 지자체 853곳 17만4935명, 2단계로 지자체 출자기관과 지방공기업 및 자회사 600곳 1만5974명을 정규직화할 예정이다. 이미 목표치의 88% 넘게 달성했다고 한다. 마사회는 비정규직의 72.9%에 달하는 5561명을 정규직화했고, LH(토지주택공사) 2997명과 코레일(철도공사) 1825명 순으로 많았다. 지자체에서도 정규직 전환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데, 직원과 친인척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문턱이 낮은 비정규직으로 진입해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드러나면서 사달이 났다. 
 
서울교통공사(지하철공사) 108명을 비롯해서 강원랜드 99명, 한국가스공사 41명, 한전KPS 40명, 한국가스기술공사 30명, 국립공원관리공단(무기계약직 포함) 21명, 한국국토정보공사 19명, 국립생태원 18명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서울교통공사의 친인척채용은 1912명에 달하고, 최근 정규직으로 전환된 108명 중에서 3급이상 고위직의 친인척이 26명이다.
 
공사·공기업이나 대기업에 오랫동안 근무한 직원이 ‘업무상’ 사고나 질병, 혹은 사망 등으로 일할 수 없을 때 가족을 돕기 위해 일자리를 모색하는 것은 사회적 상식에 반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의 2016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694개 기업의 단체협상에서 정년퇴직자 및 장기근속자의 자녀 등의 우선·특별채용 규정이 461곳이었고, ‘업무 외’ 사고·질병·사망자의 자녀 등에 대한 채용규정도 117곳에 달했다. 대부분 삭제되거나 사문화됐다고 하지만, 일부 기업에는 “정년 조합원의 요청이 있으면 결격사유가 없는 한 직계가족을 우선 채용한다”는 규정이 남아 있다. 노동계에 만연했던 발상들이 팽창하는 공공부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짬짜미로 대를 잇고, 가족끼리 철밥통을 나누겠다는 발상은 공공부문과 노동조합이 방어해야 할 가치가 아니고, ‘공화국의 정신’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공시 준비생들은 이 문제를 성난 시민들의 촛불이 겨냥했던 ‘권력사유화’의 뒤틀린 흉내로 보고 있을지 모른다. 당이 곧 국가요, 기업이었던 옛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은 근본적으로 대리인체제에 대한 신뢰붕괴에서 비롯됐다는 진단이 있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케이크를 자를 수 있는 권한과 먼저 고를 수 있는 권한을 분리시켜서 공정하게 배분하는 예화를 들었는데, 제도설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빵을 나눌 권한과 먼저 고를 권한을 당과 관료계급이 독점했던 체제는 밑동이 썩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공공부문에 확산되는 블라인드채용이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의 ‘공화국(La République)’에 그려진 공정한 국가상이 아니라 임직원의 친인척을 가리는 데 용이하겠다는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지배구조는 기본적으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므로 자기목적화하거나 수탁자 및 대리인의 의무와 책임을 망각하기 쉽다. 
 
세계는 ISO26000을 통해서 기업을 비롯한 여러 경제주체와 함께 공공기관·공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확인했다. 중앙과 지방정부가 공공부문의 증원과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면서 공공부문 개혁과 필요한 구조조정을 병행하지 않는다면, 수탁자의 공적 의무와 사회적 책임에 반하는 모럴해저드를 방조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김병규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인구변화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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