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이정모의 세상읽기)잠을 허(許)하라
2017-07-14 06:00:00 2017-07-14 06:00:00
 1953년은 이래저래 중요한 해다. 우선 한국전쟁이 긴 휴전에 들어갔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또 뭐가 있겠는가. 왓슨과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서 현대 생명과학의 문을 연 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지구인에게 의미가 있는 해이기도 한데, 바로 ‘잠’에 대한 과학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잠 연구라고? 그게 뭐야?”라고 의아해 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웬만한 독자들에게 잠 연구의 결과는 상당히 많이 알려져 있다. 수면은 꿈을 꾸는 렘수면과 네 단계의 비(非)렘수면으로 구성되며, 사람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렘수면 동안에 꿈을 꾸면서 땅을 파헤치는 동작을 한다는 사실쯤은 대개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잠을 잘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이라는 주장도 있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한 적응이라는 설도 있다. 물론 이것들도 잠의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주요 기능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잠의 역할이 고작 기억과 에너지 절약이라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쯤 감수하고 영양분을 더 섭취하더라도 잠을 아끼는 게 생존에 더 유리할 테니 말이다.
 
게다가 잠을 자지 않는 동물은 없다. 고래 같은 해양 포유류는 잠이 들면 익사한다. 아가미가 없기 때문이다. 고래는 익사를 면하기 위해 양쪽 뇌가 번갈아 자는 방식을 택했다. 하루살이 수컷은 겨우 15시간 정도밖에 못 산다. 짝짓기 하기에 한참 시간이 모자란다. 그래서 입도 없다. 먹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하루살이 수컷마저도 잠은 잔다. 잠은 어떤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뜻이다.
 
왜 모든 동물은 잠을 잘까? 2013년 10월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발표된 미국 로체스터 의과대학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잠을 자지 못하면 뇌에 노폐물이 쌓여 탈이 나기 때문에 모든 동물은 잠을 잔다고 한다. 잠을 자면서 뇌에 쌓인 노폐물을 씻어낸다는 것이다. 이때 노폐물은 뇌에 저장된 온갖 잡스러운 기억과 정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물리적인 노폐물이 쌓인다. ‘아밀로이드 베타’라는 일종의 단백질이 바로 그것이다. 아밀로이드 베타는 (요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알츠하이머병을 일으키는 물질로 매일 우리 뇌에 쌓인다. 그렇다면 잠은 아밀로이드 베타를 어떻게 청소할까?
 
이른 아침 도로가 깨끗한 이유는 물차가 물을 뿌려대며 도로를 치우기 때문이다. 뇌도 뇌척수액으로 아밀로이드 베타를 청소한다. 물차는 대낮에도 다닌다. 뇌도 다른 활동을 하면서 청소활동도 하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 뇌가 활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뇌의 중량은 체중의 2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에너지는 무려 20퍼센트나 사용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뇌 활동을 하면서 청소를 병행할 수가 없다. 깨어 있을 때는 신경세포 사이의 틈새가 좁아서 뇌척수액이 깊이 침투하지 못한다. 그런데 깊은 잠이 들면 신경세포 사이의 틈새가 넓어져서 뇌척수액의 흐름이 증가한다. 이때 아밀로이드 베타가 씻겨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면 잠을 자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뇌는 참지 않기 때문이다. 뇌는 피곤하면 스스로 스위치를 내린다. 그래야 뇌를 청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은 아무리 바쁘다고 건너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지난 9일 우리는 끔찍한 교통사고 장면을 동영상으로 목격했다. 버스에게 들이받힌 승용차가 형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면서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원인은 버스 운전사의 졸음운전. 사고가 나자 모든 버스와 트럭에 자동긴급제동장치(AEB)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시 일고 있다. 맞다. 의무화해야 한다.
 
그런데 AEB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번에 사고를 낸 버스기사는 연일 12~16시간을 운전하고 4시간밖에 수면을 취하지 못했다. 이번 교통사고의 주범은 잠잘 틈을 주지 않는 노동환경이었다. 유럽에서는 운수노동자가 하루에 8시간 이상 운전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2시간마다 의무적으로 20분간 휴식해야 한다. 운전대 안에 운행기록이 자동적으로 기록되는 장치가 있어서 규정을 위반한 회사를 처벌한다. 당연히 비용이 증가한다. 한국사회도 이제는 안전비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올해로 정전 64주년이 되었다. 이제는 휴전에서 종전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마찬가지로 노동자에게 잠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세월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