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월동지로 떠날 채비하는 왜가리
2026-09-17 10:07:08 2026-09-17 10:07:08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오면, 우리 곁을 지키던 여름 손님들이 떠날 채비를 서두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변이나 습지를 걷다 보면 한 번쯤 무심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셨을 새, 바로 '왜가리'입니다. 서울 청계천 한복판에서도 유유자적 거닐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새지만, 막상 사진으로 담으려고 하면 "에이, 흔한 새잖아" 하고 카메라를 슬그머니 내리게 되곤 하지요.

왜가리가 뾰족한 부리로 두마리의 숭어를 한번에 잡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왜가리만큼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생태를 가진 새도 드뭅니다. 남쪽 월동지로의 긴 이동을 앞둔 요즘, 전국 하천과 습지에서는 장거리 여행을 위해 부지런히 배를 채우는 왜가리들의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왜가리의 사냥 실력은 그야말로 기가 막힙니다. 습지나 하천 가장자리에 조각상처럼 꼼짝하지않고 서서 물속을 노려봅니다. '움직이지 않는 미학'을 보여주다가, 먹잇감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벼락처럼 긴 부리를 뻗어 낚아채지요. 움직이는 물체를 쫓는 시선도 매우 민첩합니다. 심지어 수달의 움직임을 유심히 쫓아 날아다니다가, 수달을 피해 도망치는 물고기를 중간에서 낚아채는 영리한 '어부지리' 사냥술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물고기만 먹는 줄 아셨다면 오산입니다. 개구리, 뱀은 물론이고 논이나 하천가를 다니다 눈에 띄는 쥐를 낚아채 삼키는 모습도 종종 목격됩니다. 커다란 물고기나 쥐를 잡았을 때, 긴 목을 꿈틀거리며 먹이를 넘기는 모습을 보면 마치 큰 뱀이 먹이를 삼키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많은 분이 "왜가리의 '왜'가 혹시 일본(倭)을 뜻하는 건가?" 하고 궁금해하십니다. 하지만 왜가리의 이름은 소리에서 유래했습니다. 왜가리가 날아오르거나 위협을 느낄 때 "왜- 왝-" 하고 우는 소리를 내는데, 이 울음소리에 새를 뜻하는 '가리'가 붙어 '왜가리'가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흔히 백로, 두루미, 황새와 많이 헷갈려하시지요. 아주 쉽게 구분하는 팁이 있습니다. 일단 몸 전체에 푸르스름한 잿빛(회색) 기운이 돌고, 머리 뒤로 멋진 검은색 댕기깃이 늘어져 있다면 십중팔구 왜가리입니다. 두루미나 황새는 몸집이 훨씬 크고 보기 드문 새들이라 도심 하천에서 만나기는 어렵답니다.
 
왜가리는 덩치가 꽤 큰 편이라 성체가 되면 흰꼬리수리 같은 대형 맹금류 외에는 딱히 천적도 없습니다. 흰꼬리수리가 이따금 위협하듯 공격하는 시늉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왜가리가 먹이로 희생되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본래 왜가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 추운 겨울이 오면 동남아시아로 먼 길을 떠나는 여름 철새입니다. 이듬해 4월에 다시 돌아와 나뭇가지로 엉성하지만 튼튼한 둥지를 짓고 집단 번식을 하지요. 대부분 먹이가 풍부한 하천가 나무숲에 둥지를 틀며, 중대백로들과 섞여서 번식하기도 합니다.

월동지로 이동을 앞둔 왜가리가 포항 형산강에서 사냥한 숭어를 물고 날아가고 있다.
 
하지만 요즘은 겨울철에도 우리 주변에서 왜가리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여름 철새인데 왜 안 떠나지?" 싶으실 텐데요. 겨울에 보이는 개체들은 한반도보다 더 북쪽(시베리아나 중국 북부)에서 번식하고 따뜻한 남쪽을 찾아 내꼼온 개체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기후 온난화 영향으로 아예 떠나지 않고 텃새처럼 한반도에 정착하는 무리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개발 활동으로 인해 여럿이 모여 알을 낳던 집단 번식처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서식지 환경이 변하면서 이들의 번식지도 조금씩 북상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 옛 그림이나 시가 속에서 왜가리는 두루미(단정학)만큼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길고 긴 자태와 특유의 고요함으로 은근한 멋을 풍깁니다. 참고로 미국의 세계적인 조류보호 단체인 '오드번 협회'의 상징 새는 백로(대백로)인데요, 왜가리 역시 그 친척 격으로 한곳에 오래 서서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과 쉼 없이 먼 길을 떠나는 강인한 생명력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가을의 문턱, 장거리 비행을 위해 부지런히 깃털을 정돈하고 사냥에 집중하는 왜가리를 만나신다면 잠시 걸음을 멈춰보세요. 도심 속에서도 자연의 숨소리를 묵묵히 이어가는 이 멋진 사냥꾼에게 따뜻한 응원의 눈길을 보내주시면 어떨까요?
 
글·사진=김연수 생태칼럼니스트 wildik02@naver.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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