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박근혜정부의 비선실세 최순실씨 의혹과 관련해 11월8일 오후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압수수색을 마치고 압수품을 들고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뉴스토마토 이재영기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최순실의 장난 같은 농단만 들춰냈지, 탄핵안 가결 이후 수습국면 속에 정경유착 비리가 묻히고 있다. 특검이 집중하는 삼성, 롯데 등을 제외하고는 이제 차기 정권이 어디냐에 더 관심을 두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오래된 정경유착에 있다. 사유화된 권력에 재벌들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갖다 바쳤다. 일부 재벌 총수들은 “정부가 돈을 내라면 낼 수밖에 없는 게 기업인”이라고 해명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역대 정권에서도 사회공헌 차원에서 기부를 종용했고 전경련이 중재해 재계 순위대로 납부했다”고 말했다. 일종의 준조세로, 자신들은 철저히 피해자라는 항변이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 시선은 차갑다. 대가성 유무를 떠나 범법에 동조한 공범적 행태로,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사태로 본다.
게다가 삼성은 적극성을 띠고 능동적으로 최씨의 이해를 도왔다는 게 특검의 판단이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이는 나머지 그룹들에게도 면죄부가 주어져선 안 된다는 지적이 높다. 검찰 고위간부 출신 한 법조인는 "법망을 피해가기 위해 대가성 여부를 철저히 부인하지만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단언했다. 검찰은 최씨 등의 공소장에서 기업들이 세무조사나 인·허가 등의 불이익이 두려워 돈을 냈다고 적시했다. 5공 청문회의 발단이 된 일해재단 사건도 그런 이유에서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된 바 있다.
5공 청문회가 열렸던 28년 전과 비교해 매출·순익·시장점유율 등 재벌기업들의 실적 지표는 몰라보게 높아졌지만 경영 투명성은 그에 비례하지 않았다. 에티스피어 인스티튜트가 발표하는 ‘세계에서 가장 윤리적인 기업’ 리스트에 국내 기업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007년부터 매년 150여곳의 명단을 발표한 가운데, 올해까지 국내 재벌이 포함된 적은 전무하다. 이익을 독점하고도, 그 이익이 몇몇 총수일가에 귀속되면서 반재벌 정서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총수의 제왕적 경영행태를 가능케 하는 지배구조 또한 큰 진척이 없다. 삼성, 현대차, 롯데 등은 여전히 얽히고설킨 순환출자 고리에 묶여 있다. 적은 지분으로도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경제민주화가 시대 과제로 부상하면서 이들도 서둘러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려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시 불법·편법이 난무할 수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건도 권력을 악용한 경영권 승계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게 재벌문제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이사회 중심의 선진 경영체제와도 거리가 멀다. 올해도 권력기관 출신이나 재벌 총수와 학연·지연으로 엮인 인사들이 다수 이사로 선임됐다. 독립성이 저해되면서 총수일가의 부당이익 편취를 반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어려워졌다. 일부 진전도 있었다. 이달 19일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가 제정·공표됐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을 적극 행사하도록 유도하는 자율지침이다. 다만, 배당 등 이해관계가 걸린 안건 외에 기존 거수기 행태를 벗어날지는 불투명하다.
윤리경영을 해치는 후진적인 조직문화도 여전하다. 기업집단의 이기주의가 범법 행태로 자행되는 담합의 적폐에 시장은 공정성을 잃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올 1월부터 8월까지 적발돼 시정명령을 내린 국내외 담합 건수만 37건이다. 과징금보다 이로 인한 시장의 독점적 지위와 이득이 큰 까닭에 기업들은 담합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뿐만 아니다. 횡령·배임 등 각종 경제범죄에 연루되더라도 '사면'이라는 최후의 보루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기간 건강악화로 인한 병원행은 필수코스가 됐다.
이재영 기자 leealive@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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