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면 하나.
거의 10년을 운행하던 자동차 인포디스플레이가 고장났다. 정비업체에서는 장비 생산업체가 없어졌으니, 전문 업체에서 교체하는 걸 추천했다. 전문 업체에서는 자동차용 인포디스플레이는 국내 생산업체가 없고, 중국에서 모두 만든다며 중국산 부품을 추천했다. 인포디스플레이뿐 아니라 국산 차를 포함한 거의 모든 차의 패널이 중국에서 생산된다는 점에 놀랐다. 결국 원래 부품보다 대형 화면을 제공하면서 내 차에 맞는 인테리어를 제공하는 부품으로 교체해야 했다.
장면 둘.
서울 문래동 수가공 기계공업단지가 위축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임대료가 올라 기존 단지가 카페로 교체된다는 것이었다. 이 단지의 의미는 각별하다. 양산 목적이 아니라 시제품 생산을 위한 금형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시제품 생산을 위해 이곳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한국 제조기업은 주문 후 1~2일 내 납품하는 이곳의 반응 속도 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 단지가 해체되고 나면 우리 제조기업의 하드웨어 개발 능력 역시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서울 구로동 직물생산단지 해체가 장기적으로 한국 의류산업에 악영향을 미친 점이나, 성수동 인쇄·섬유·기계 공업단지의 전환이 우리 제조 생태계에 미친 영향과 비견할 만하다. 물론 구로동은 정보통신 산업단지로 바뀌었고, 성수동은 상업관광단지로 전환되고 있다. 하지만 그 파급력은 우리 산업 전체의 제조업 반응 능력이 약화되는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것이다.
장면 셋.
2025년 일본유통학회의 초청으로 일본에 갔다. 김포-하네다 노선이라 출국 수속 절차에 나름 자신만만했다. 얼마 전 김포공항의 스마트 공항 시스템에 생체 정보를 등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포공항 국제선에서는 국내선에서 입력한 정보 말고도 여권 정보를 실물로 따로 등록하도록 했다. 그 이후에도 스마트 공항 시스템 대기줄은 미등록 대기줄보다 진행이 느렸다. 출국장 입구에 도달해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처음 시스템에 등록한 승객에 대해 공항 직원이 수동으로 다시 검사하는 이중 절차가 있었던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이미 국제선 스마트 시스템에 등록했던 터라 더 번거로왔다. 두 공항이 서로 다른 공사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승객 편의를 위한 정보 공유와 서비스 제공, 온라인 등록 처리에 대한 신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면 넷.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는 출국 절차 서비스가 느릴 것으로 각오했다. 일본의 정보통신기술 활용은 우리보다 뒤처질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항공과 제휴된 공항 시스템은 탑승권의 발급, 수화물의 탁송, 출국장 입장, 심지어 탑승 게이트에서 비행기 탑승까지 탑승권 발급 때 등록한 안면인식 하나로 모두 이용 가능했다. 신속하고 편리한 서비스가 공항과 출입국 당국, 항공기 운행사의 제휴로 통합되어 있었다.
2025년을 지내면서 가장 크게 느끼게 된 것은, 생각이 적응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난 30년간 우리의 적응력은 점차 노쇠해지고, 둔해졌다. 고려 대상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속 성장을 통해 우리 사회가 변하는 모습에 적응해 있던 입장에서는 저속 변화, 아니 정체된 상황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무엇인가 기준을 정하면 전체에 바로 적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새로운 단계로 변화하기 위한 전체 기준의 조정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개별적 요구, 특수한 요구에 대한 시스템으로의 포용이 과제가 되면서 전체 시스템의 발전을 간섭하고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산업 목표로 인공지능 산업을 설정하면 모든 영역에서 인공지능이 키워드가 되어야 하고, 개인정보 보호가 목표가 되면 개인정보 보호가 서비스의 불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영역이 지켜야 하는 문제로 둔갑해버린다. 그러니 수공업 기계가공단지가 곧 다가올 피지컬 인공지능 시대의 초석이 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쉽게 버린다. 공공 서비스의 개선을 위해서는 공공기관의 주재 아래 다양한 기관의 통합적 정보관리가 이용자에게 편의를 더 줄 수 있는데, 우리는 그걸 쉽게 막아버린다.
우리가 목표하는 것은 산업 생태계의 발전이고, 이를 위해 인공지능이 수단이 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개별 이용객의 편의를 최대한 개선하면서 정보의 자기결정권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지, 무조건 정보의 흐름을 막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결국 목표 자체는 목적이 갖는 합리성에 따라야 한다. 이 합리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고민, 그리고 성찰이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외부에서 그대로 가져올 수 있는 참조 사례가 없다. 우리가 그만큼 발전하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스스로 개척하고 스스로 위험을 부담해 발전시켜야 한다. 선례를 따라 그대로 진행하면 되던 세상이 아니니, 우리에게는 예측 가능한 위험 부담에 대한 대가를 각오할 필요가 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산업계가 마주치고 있는 도전 과제를 우리 방식으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위험 부담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새해 우리 사회의 역동성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새해에는 잘 사는 세상, 잘 살아도 되는 세상, 잘 사는 것이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길 기원한다.
이동일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 한국유통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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