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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류이치 사카모토 '비움으로써 채우는 소리의 순환'
'전자음악 사이 불어오는 숨소리'…생과 사 갈림 질문하는 음반 '12'
직장암 치료하며 작업 몰두…"호모 사피엔스 20만 년 동안 음악 끊기지 않아"
'YMO' 활동 당시 세계 전자음악 선도…Z세대 음악가 진저루트도 최근 내한 헌정 무대
2023-01-30 14:47:08 2023-01-30 14:47:08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시작은 남은 수명이 고작 반년이라는 시한부 선고. 다만, 그을음에 타지 않기로. 계속 음악하기로. 누군가에겐 '희망의 메시지'일지 모르기에.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가 지난 17일 발매한 음반 '12'는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생과 사의 갈림, 존재론적 질문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련(修鍊)에 가깝습니다.
 
피아노·신시사이저를 기반으로 설계한 소리 건축은 아찔한 공(空)의 미학. 광활한 공간감을 조성하는 전자음이 평면의 대지라면, 피아노 선율과 거친 숨 소리들이 각각 점과 선으로 오로라를 일렁이는 식.
 
가만 집중하다보면 금속성 물체가 달그닥 거리거나, 강아지가 짖고, 살짝 움직일 때 나는 미세한 일상의 소리들도 겹쳐집니다. 흡사 무중력 우주선처럼 설계된 스튜디오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입니다.
 
직장암 투병 중에도 지난 17일 음반 '12'를 발매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 사진=씨엔앨뮤직
 
4분 33초 간 피아노 앞에서 아무것도 않고 퇴장한 존 케이지나 "사기일 수 밖에 없는 예술"을 외쳤던 백남준까지는 아니어도, 물성 자체의 본질을 마주보는 동양적 청각 예술이란 점은 분명합니다. '깨진 유리판 위 올려져 있는 큰 돌덩이' 작품으로 유명한 이우환 화백의 드로잉을 앨범 커버로 쓴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멜로디보다는 전위의 연주가 중심이 되는 음반은 시규어로스의 최근작들을 연상시키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끝없이 느려지거나 팽창하기를 반복하는 일종의 실험, 익스페리멘탈 사운드입니다.
 
시규어로스가 2016년 아이슬란드 국도 'Route one'의 1332km를 돌며, 각 곡에 '63º32'43.7'N 19º43'46.3'W' 같은 해당 지역의 위도와 경도로 표시한 것처럼, 사카모토는 자신이 쓴 곡의 날짜 별로 '20210310'이라는 제목을 달아뒀습니다.
 
일기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만든 것인데, 어떤 연주곡이든 그 잔향이 주는 여운이 클 땐, 제목에 달린 숫자가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법인가 봅니다. 진동 주파수 세기를 듣기 좋게 선별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청각 예술이라는 음악의 정의에 천착한다면, 이 소리는 음악일까, 라는 고민 같은 것들도 더 깊게 하게 되고요.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가 직장암 투병 중에도 지난 17일 발매한 음반 '12' 앨범커버로 이우환 화백의 드로잉을 썼다. 사진=씨엔앨뮤직
 
'일상에 기반한 물성'의 사카모토식 음악 제작과정은 2017년 다큐멘터리 '코다(CODA)'에서도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음반 'ASYNC(2017)'에 실릴 곡들을 만들어가는 과정. 2014년 중인두암 진단을 받고 치료 받는 가운데, 숲과 빙하 뒤 묻혀있던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과정들을 보여줍니다.
 
2021년 직장암 전이 판정을 받은 후 내놓은 이번 작품이 사실상 마지막 음반일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나 미니멀한 전자음들 사이로 슬픔을 머금으면서도 꾹꾹 삶을 이어가는 건반과 숨처럼,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음악은 끊기지 않을지 모릅니다. 'CODA'에서처럼 입에 항암제를 투여하면서도 건반 앞 분투해 가는 숨결 같은 음악이 결국은 삶이니까요.
 
"호모 사피엔스 20만 년 역사 동안 예술도 음악도 시도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며 나아가는 사카모토입니다.
 
비움으로써 채우는 소리의 순환 과정에서 생을 봅니다. 그것은 어쩌면 삶의 일별을 앞둔 그렇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담담한 순례자의 걸음 같은 것.
 
삶이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건축한 음과 감정의 파고는 그렇게 생과 사에 대한 순간을 얇은 사(紗)처럼 펼쳐내는 것입니다.
 
직장암 투병 중에도 지난 17일 음반 '12'를 발매한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71). 사진=씨엔앨뮤직
 
그 조용한 걸음이 어디선가 '희망의 메시지'로 전파되며, 피어나는 순간은 생각지도 못한 순간 맞닥뜨리게 되는 게 아닐까.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왓챠홀에서 열린 진저루트(본명 카메론 루·27)의 내한 공연 현장. 미국 남부의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을 횡단하다 갑자기 'YMO(Yellow Magic Orchestra, 사카모토 주축으로 70년대 후반 결성돼 일본 일렉트로닉 장르를 세계로 전파한 전자 음악 밴드)'의 'Tong Poo' 선율을 유성우처럼 쏟아내는 이 음악가의 손가락이 클로즈업될 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진저루트는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일본의 시티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Loretta’, ‘Loneliness’ 같은 음악들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Z세대 음악가입니다. 이날 그는 자신의 음악이 최근 전 세계 전파되고 있음을 "알고리즘에 감사한다"고 재치있게 표현하더군요.
 
영화학도 출신이기 때문인지 공연에선 연출이 대단했습니다. 확성기를 통해 소리를 일그러 뜨리는 가 하면, ENG 카메라맨이 그의 옆에 분신처럼 붙어, 빈티지한 VHS 질감으로 현장 영상을 뒤의 빔프로젝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하며 관객과 소통했습니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을 두른 시각과 청각 예술이 YMO 연주로 이어지는 구간에서는, 사카모토가 현대 전자음악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서도 곱씹게 되더군요.
 
첨단의 음악이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의 격차를 뛰어 넘고, 우주에서 유영하듯 관중들의 춤을 만들어 낼 때, 생각했습니다. 음악은 죽지 않고 장대한 수평선처럼 넘실대며 이어져가는 것이란 것을.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왓챠홀에서 첫 단독 내한 공연을 진행한 Z세대 음악가 진저루트. YMO의 대표곡을 연주하는 순서를 꾸몄다.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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