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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의 ‘잘 안 알려진 얘기들’
서태지 30주년 특별 기획 시리즈 #8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 인터뷰
20여년 간 함께 ‘창작의 터널’ 지나
‘멘탈 갑’ 서태지…“오로지 실력과 능력 봐”
2022-04-01 00:00:00 2022-04-01 09:03:26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서태지 데뷔 30주년을 맞아, '권익도의 밴드유랑'은 그간 깊이 다뤄지지 않고 오히려 잘 다뤄지지 않아 간과돼 왔던 부분들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서태지 음악이 한국 대중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미쳐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의미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 더 자세히 들여 보는 내용들이 될 것이다. 평소 서태지가 추구해온 음악적 정신이 ‘큰 울림’이라고 줄곧 생각해왔다. 지난 시간 그것을 가슴으로 느껴왔다면, 이제는 머리로써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며 세상과 호흡해보고자 한다. >> 참고기사, (권익도의 밴드유랑)서태지 드러머, 때론 기묘한 ‘과학자’
 
올해 데뷔 30주년을 맞은 뮤지션 서태지. 빨간 레게 머리에서 베이비펌 헤어스타일로 변신했던 '2001 섬머소닉페스티벌' 참여 당시 모습. 사진=서태지아카이브·서태지컴퍼니
 
반세기 전 창고에 묵혀뒀던 수십 시간 영상 테이프를 원본에 가깝게 손질했고, “그 이상 자르면 로큰롤 역사에 범죄”라 했으며, 시대의 아이콘을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눈앞에 생생히 구현했던, 피터 잭슨(비틀스 다큐 ‘겟백’ 감독)과 그의 노고에 대해 줄곧 생각했다.
 
“서태지에 관한 수많은 기사들은 이미 다 아는 얘기들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 같아, 이번엔 좀 더 깊고 구체적인 잘 안 알려진 얘기들을 해보고자 합니다”로 시작되는 글을 읽고서다.
 
지난 22일 서태지밴드의 기타리스트 탑(안성훈)을 서면으로 만나봤다. 서태지 음악이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스포츠카라면, 그는 10단 고속기어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며 곡에 생동감과 탄력을 불어 넣어왔다.
 
서태지와 20여년의 음악적 동행을 이어온 오랜 ‘지음(知音)’이자, 서태지 음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창(窓)’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가 보내준 A4 10페이지 분량의 글 더미는 2인칭 시점으로 바싹 달라붙는 잭슨의 앵글 같았다. 음악 작업으로 활활 끓는 ‘Techno-T(서태지 음악 스튜디오 명칭)’의 온도부터 서걱거리는 공기까지, 살갗으로 느낀 그대로를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전해본다.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은 서태지와 20여년의 음악적 동행을 이어온 오랜 ‘지음(知音)’이자, 서태지 음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창(窓)’과 같은 존재다. 탑(왼쪽)과 서태지. 사진=서태지컴퍼니
 
서태지와의 첫 만남, 그리고 ‘울트라맨이야’
 
탑은 서태지밴드로 활동하기 전부터 바세린과 닥터코어911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드러머였던 그는 록커를 꿈꾸던 21살 청년으로, 록 메탈에 심취해 댄스 음악을 멀리 했다. 서태지와아이들(1992년)이 등장하고는 생각이 역전됐다. “춤을 따라 출 정도로 열렬한 팸임을 자부했습니다. 특히 기타리스트가 되고 나서는 태지 씨가 만든 리프, 작곡법 등을 늘 동경했습니다.”
 
그가 서태지와 처음 연을 맺은 것은 양군기획(YG엔터테인먼트 전신) 덕분이다. 처음 두 달간 미국 ‘YG기타녹음세션’에 관한 제안을 받았으나, 당시 1집 음반 활동을 앞둔 닥터코어911 이유로 여러 차례 고사했다. “여러 번 미팅 후에도 제가 선뜻 수락하지 않자 YG 측에서 마지막 히든 카드를 꺼내듯 얘기해주더군요. 사실은 서태지가 밴드로 컴백한다고….”
 
21세기, 세계는 지난 천년의 석양과 일별하고 있었다. “강한 메탈사운드”라 전해들은 서태지의 복귀는 문화적 환영이자, 그 개인적으로는 오랜 기간 품어오던 음악적 질문과 교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내 음악인생이 크게 발전할 수 있도록 손을 뻗은 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안 하면 평생 후회하는 거죠. 저는 올인 했습니다.”
 
당시 서태지는 베이스에 자신의 사촌, 드럼엔 미국인, 나머지 기타 두 명을 한국에서 찾을 계획이었다. 국내 언더밴드 공연 영상을 돌려보던 중 탑의 존재를 알게 됐고, 자신의 친인척에게 부탁해 실제 공연 영상까지 받아보며 섭외 가닥을 좁혀갔다. 메이져리그 선수 스카웃 전 그의 풀 경기를 카메라에 담듯.
 
“6집 앨범 장르와 어울리는 액션을 내가 하더랍니다. 그게 너무 맘에 들었대요. 나중에 듣기를 제가 후보 0순위였다고 칭찬 섞인 표현을 해줬는데 너무 감사하고 큰 영광이었죠.”
 
세션 수락 뒤 미국에 있던 서태지와 여러 차례 전화통화로 향후 계획을 나눴다. 음악 얘기, 헤어스타일(드레드머리), 앞으로의 활동….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 사진=서태지컴퍼니
 
서태지와의 첫 만남은 미국이었다. 6집 컴백 전 미국에서 한 달 가량 연습을 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한 최창록과 영어, 요리를 잘하는 양군기획 직원 한 명, 총 셋이 미국으로 향했다. 혹시나 모를 기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렌터카도 세 번이나 갈아탔다. 비행기로 12시간, 차로 3시간을 달려 목적지인 아파트에 도착해 벨을 눌렀다.
 
“문이 아주 찔끔 열리더니 안경 쓴 눈만 보였습니다. 서태지였습니다.” “해체 후 미국에서 자유롭게 살았지만 파파라치에 대한 경계심이 매우 큰 듯. 거실과 방 모든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인사하며 악수를 하는데 태지 씨 손바닥 매우 거칠어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들어가자마자 흥분된 마음으로 헤드폰을 끼고 볼륨을 높였다. “너무 궁금했습니다. 태지 씨의 새 노래가…. 울트라맨이야 MR이었습니다.”
 
당시 ‘울트라맨이야’를 비롯한 서태지 6집 전반은 Key를 ‘A’까지 낮춰 어둡고 거친 질감을 표현했는데, 그 트렌드는 메탈리카 이후 새 바람을 일으키던 콘(KORN)이 이미 정립시킨 방식이었다. “낮춘 키에 기타줄 텐션을 유지하려면 기타 줄이 두꺼워져야 하는데, 두꺼워진 기타줄에 디스토션을 걸면 매우 독특한 기타사운드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미 저 같은 국내 메탈 밴드들은 KORN 같은 하드코어 음악을 많이 들어왔고, 유행이 한번 지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첫 인상에 별다른 장르적 특이점은 발견하지 못했었습니다.”
 
언뜻 KORN과 비슷하게 들렸으나, 반복해서 듣다 보니 개성적인 사운드임은 분명했다. 그는 “A드랍 튜닝에서 그 떫고 기괴한 갈색의 끈적한...”이라며 “벽 구석 한편에 곰팡이가 얼룩지고 눅진눅진한 침대에 누워 들리는 환청 같은 괴기음.. 그런데 그런 괴기음을 정말 예쁘게 필터링해 잘 가꾼듯한 기타 사운드가 6집에서 들렸다”고 했다. 
 
“앰프 마이킹한 톤에 라인을 섞은 듯 기타 녹음의 공식적인 방법이겠지만 상당히 정제된 기타 톤을 만든 믹싱 실력에 매우 감탄했습니다. 기타는 녹음 방법이 거의 비슷하더라도 결과물이 믹싱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 그 퀄리티가 달라집니다.”
 
보통 이 같은 거친 뉴메탈 하드코어에선 목소리를 주로 거칠게 긁는 그로울링이나 스크리밍이 주가 되는데, 중성적 목소리와 밝은 멜로디로 표현한 방식 또한 음악을 독특하게 만들어준 요소였다. “그게 어색해야 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오리지널리티 있더군요. 역시 앨범 5장을 만든 노련한 프로라 이런 사운드에 밝은 멜로디를 만들어 버리는구나..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당시 6집은 일종의 문화적 패러다임 전환이라 볼 정도로 영향력이 컸던 음반이다. 프랙털 이미지와 옛 한글을 활용한 음반 속지와 빨간색 케이스, 여기에 빨간색 레게머리로 변신한 서태지는 당시 발라드와 댄스 일색이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다시금 충격파를 던졌다.
 
이후 서태지가 재녹음한 6집 ‘리레코딩’ 앨범(2003년 2월 발표)은 한국 대중음악 사운드의 선진화를 이룬 앨범이다. 당시 세계적인 하드코어 밴드 콘을 프로듀싱한 척 존슨과 ‘아이들’ 시절부터 드럼 녹음을 맡아온 조시 프리스(나인인치네일스, 스팅 등 앨범 참여) 등이 팔을 걷어붙여 완성했다. 당시 다큐에서 서태지는 스티비 레이 본, 메탈리카처럼 앰프 수십개를 쌓아놓고 기타 톤을 다듬는다.
 
“드럼을 제외한 베이스, 기타 연주도 태지 씨가 직접 다했습니다. ‘6집 활동 이후라 그런지 연주가 손에 익어 거의 한 큐에 레코딩을 끝냈다’며 ‘Feel이 그래서 좋았다’라는 말과 함께 매우 흡족함을 표현해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네어 소리가 너무 맘에 들었는데, 태지 씨가 이 리레코딩 드럼과 베이스 음원을 샘플링 해 7집 작업 땐 데모용 시퀀싱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 사진=서태지컴퍼니
 
일본 생활 11개월, 7집 ‘Issue’ 공동 편곡자로
 
탑이 재편곡한 “‘컴백홈’(6집 활동 버전)에 한방 먹고 ‘난 알아요’(2002 ETPFEST 버전)에 한방 먹었다”던 서태지는 그에게 7집 ‘이슈(Issue)’ 음반 작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11개월 간 잠자는 8시간을 빼고는 서태지와 서로 붙어 있는 각자의 부스에서 작업을 했다. “내가 만든 결과물을 태지 씨가 듣고 모니터링 해줬습니다. 매일 숙제 검사하는 선생과 학생처럼요. 저에겐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멋있고 잘 만든 것 같은데 왜 별로라고 하는지 잘 수긍이 되질 않았다. “결과물이 없더라도 열심히만 하자.. 라는게 태지 씨가 제게 바라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의구심에 엉킨 상태로 작업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센스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태지 씨가 모니터해주며 설명했던, 내가 반박하던 것들이 모두 이해되더군요. 저도 나름 잘 만든다고 자부했었는데 한낱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부끄러웠어요.”
 
‘FM 비즈니스’ 인트로 부분을 만든 뒤 서태지에게 들려주던 순간은 아직도 짜릿하다. “모니터 해보라고 건네 줬는데, 본인 부스에서 여러 번 듣더니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엄지손을 치켜 올렸습니다. 그 장면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였는데 순간 천국이었죠. 저도 노력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식사도, 언어도 적응이 되질 않았지만, 그는 서태지와 서로 다른 생활리듬을 차츰 하나로 맞춰 갔다. 일본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엔 나름대로 멋지다고 생각하는 구성과 리프를 만들어 냈고, ‘와치아웃(Watch Out)’ 데모 버전까지 완성시키게 된다.
 
7집 ‘이슈(Issue)’는 거친 질감 속에서도 서태지 특유의 빼어난 멜로디 라인과 일반 기승전결을 따르지 않는 다이나믹한 악곡 구성이 앨범 전체를 휘감아, 지금도 실험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아낸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서태지는 탑을 비롯해 I.N.A(X재팬 히데 앨범의 공동 프로듀서이자 프로그래머) 등 전문가들과 함께 앨범을 완성했는데, 이는 5, 6집까지 홀로 만들던 제작 방식을 벗어나 사운드 스케이프를 확장하는 배경이 됐다. 
 
“I.N.A씨는 옛 것에서 아이디어를 찾아 자기만의 스타일로 만드는 독특한 테크닉을 갖고 있는데 저와 마찬가지로 태지 씨 음악을 존중하고 좋아하는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얘기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저 우린 7집에 대한 감성 집중을 해야만 했고 교감하는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서태지 7집 'Issue' 활동 당시의 서태지(왼쪽)과 탑의 모습. 사진=서태지아카이브·서태지컴퍼니
 
‘드럼 쪼개기 연구’ 6집 이후부터, 9집은 스페셜앨범
 
그는 “7집이 황금코드라 불리는 캐논 변주곡의 앞 4개의 코드가 콘셉트였다면, 8집 역시 마이너세븐, 메이져세븐이 교차되는 4개의 코드가 콘셉트”였다고 설명했다. 
 
“기타 연주적으로는 리프보다는 단순한 스트로크 연주가 많았고 리듬기타의 백킹(Backing) 연주는 별로 없고 아르페지오가 많아졌습니다. 아르페지오는 부드럽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 연습량이 많았습니다.”
 
서태지 전체 커리어의 최대 노작(勞作) 8집 ‘아토모스(Atomos)’ 기타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이 음반은 록 사운드 근간에 잘게 쪼개지는 드럼 비트와 파편처럼 튀어대는 일렉트로니카 전자음들이 커버에 그려진 작고 탱글탱글한 물방울들을 연상시킨다. 자연과 미스터리를 소재로 삼은 앨범에 대해 서태지는 자신이 새롭게 창조한 장르인 ‘네이처 파운드’라 명명했다.
 
그는 “사실 태지 씨가 드럼을 쪼개며 리듬에 관한 새로운 시도를 연구한 것은 6집 활동 이후부터”라고 했다. “벌스 부분의 스네어 드럼이 롤플레이로 쪼개지는 ‘죽음의 늪’ 편곡 버전(7집 전국투어 당시)이 그 증명”이라 덧붙였다.
 
“제가 편곡할 때는 더 쪼개고 여러 스타일로 만들었지만, 사람이 치기 어렵고 복잡하다 판단한 태지 씨가 다듬어 하나의 패턴으로 정리해줬습니다. 8집에 비해 단순플레이지만 아주 좋은 콘셉트였습니다.”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 때 서태지 음악은 기타를 전면에 내세우던 기존의 어법에서 또 한 번 달라진다.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사운드와 기타의 공간계 이펙터가 몽환적인 질감으로 앨범 전체를 채색해, 전작들보다 판타지적 상상력 발현을 극대화했다. “9집은 스페셜앨범이었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5, 6, 7, 8집까지 기타를 메인 악기로 연주기 때문에 그 시점에선 뭔가 특별한 시도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그는 “시기적으로도 기타가 두드러지지 않고 받쳐 주는 게 트렌드였다”며 “기타소리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을 정도로 9집에서는 서브 개념이지만 또 없으면 안 되는 악기였다. 9집 편곡작업 때는 감을 잘 못 잡아 참여도가 적었다”고도 솔직하게 답했다.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과 드러머 최현진. 사진=서태지컴퍼니
 
레고 맞추듯 반복된 지난한 ‘창작의 터널’
 
구체적으로 들어본 서태지의 음반 작업 과정은 흡사 레고 블록을 이어 맞춰 새로운 모형을 내놓는 것과 유사하다.
 
탑에 따르면 7, 8집의 경우, 보통 한 두 개의 구성을 갖춘 기타 리프(riff)나 데모로 시작한다. 탑이 만든 것을 서태지가 이어 만들어보고 그 반대로도 시도하다, 가장 멋있게 잘 나온 것을 서태지가 결정하고 채택한다. “좋고 멋지면 ‘OK’지만, 올드하면 왜 올드한지, 식상하면 왜 식상한지 자세한 설명을 해줍니다. 멋진 게 나올 때까지 창작의 고통은 무한 반복됩니다.”
 
기나긴 창작의 터널을 지나면 즐기는 단계가 시작된다. “이제부터는 재미있어집니다. 곡들이 완성되면 녹음을 합니다. 녹음이 끝나면 태지 씨는 믹싱을 멤버들은 연습을 합니다. 믹싱과 함께 태지 씨가 시간 내서 합주에 참여합니다. 믹싱도 끝나고 멤버전원이 합주에 올인 합니다. 컴백공연이 잡히고 의상과 헤어 콘셉트 미팅을 합니다. 뮤직비디오를 찍고 활동이 시작됩니다.”
 
앨범 단위로 모이기 때문에 녹음과 공연 준비를 위해 멤버들은 고도의 집중력과 밀도 높은 연습량이 필요하다. 10시간 가량 연습실에 머물며 개인 연습과 합주를 병행한다. 전국투어 리스트 기준(23곡 정도)으로 6, 7집 때는 세 사이클을 8, 9집 때는 두 사이클을 합주했다. 
 
탑은 연습이 제일 힘들었던 곡으로는 ‘모아이’를 꼽았다. “듣기엔 편하겠지만 기타연주는 의외로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죠. 연주할 때 긴장이 안 되게 하거나 손에 착 달라붙으려면 지겹도록 쳐야합니다. 보통 굳은살이 기타 줄이 닫는 왼손가락 앞부분에 많이 생기는데 8집을 연습하다보니 검지와 엄지사이 U자로 굳은살이 생기더군요. 바 레코드(하이코드)를 많이 잡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 시절부터 9집까지, 서태지의 음악은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서태지밴드라면 모든 영역을 다 할 줄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특히 기타의 경우 서태지의 음악은 9개 앨범의 장르가 다양하기 때문에 주된 테크닉도 달라지고, 멀티플레이어가 되도록 많이 연습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리듬기타 백킹도 같은 백킹이 아닙니다. 그 장르를 깊이 파던 사람이 연주해야 익스트림한 백킹이 나와요. 커팅 스트로크도 그 장르를 오래 연주하던 사람이 쳐야 맛깔스럽고 감칠맛 나는 연주가 나오지요. 9개 앨범에서 기타테크닉이 이 두 개만 있을까요? 제가 서태지밴드를 해오면서 느낀 바, 맛깔 나게 치려면 여러 장르의 연주를 익혀야 합니다.”
 
서태지밴드 기타리스트 탑(안성훈). 사진=서태지컴퍼니
 
‘멘탈 갑’ 서태지…오로지 실력과 능력 봐”
 
그가 가까이서 지켜본 인간 서태지는 ‘멘탈 갑’이다. 힘들 땐 ‘정신력으로 버텨야지’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그 강한 멘탈이 지금의 태지 씨를 만든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적 있고요. 진심으로 남을 걱정해주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학연, 지연 같은 거 전혀 안 통하는 오로지 실력과 능력을 보는 사람입니다.”
 
서태지는 과거 탑이 속해 있던 닥터코어911도 자신의 밴드 레이블(괴수인디진)로 계약하고 싶어 했으나, 탑이 서태지밴드 합류로 닥터코어911에서 탈퇴한 후, 계약하지 않았다. 
 
“저는 당시 태지 씨한테 ‘제가 밴드를 나오게 돼도 닥코를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태지씨 계획에 차질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밴드에서 나온 나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를 버린 닥코에게 복수해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없는 닥코가 의미가 없는 것인지 아직까지 그 의중을 이해하진 못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태지 씨가 상업, 목적 이런 것 보단 사람과의 신뢰를 우선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네요.”
 
“저한테는 기회도 많이 주고 잘 챙겨주지요. 웃음 코드도 맞고 모터사이클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활동 기간 중 라이딩을 같이 한 적도 있는데 얘기하다 보니 또 같이 라이딩 하고 싶네요.”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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