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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같이 우산을 쓴다는 것
2021-09-09 06:00:00 2021-09-09 06:00:00
먼저, 다음 두 편의 시를 소개하면서 글을 시작할까 한다. 
      
가뭄에 지친 스스로의 목마름을 풀기 위해/ 잔잔한 수다를 떨고 있는/ 초가을 빗줄기처럼/ 그녀의 귓속말이/ 내 몸 속으로 스며들 때마다//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를/ 빗소리로/ 얼버무려주는/ 가을 우산
                                         -'가을 우산'(오석륜, <파문의 그늘>, 2018) 전문 
 
한여름 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고 왔다가/ 그 기운이 전혀 식을 기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지상에 제 몸만 살짝 적시고 가는/ 여우비// 그 여우비를 피해/ 잠깐 동안 내 옆에 머물렀던/ 그녀가/ 마치 여우비처럼 몸을 살짝 스치고만 갔는데// 내 몸은 그만/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여우비'(오석륜, <파문의 그늘>, 2018) 전문
 
인용한 시 '가을 우산'과 '여우비'에는 시적 화자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우산 속에 피어나는 사랑의 감정. 그것이 이 두 작품의 주된 정서다. 공통으로 ‘화자’와 ‘우산’, 그리고 그 우산을 함께 쓴 ‘여성’이 등장하지만, 분명한 것은 화자에게 피어난 사랑의 기운은 우산이 그 매개체라는 것.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짜릿한 연애 감정이 아닌가. 그 감정이 우산 속에서 꽃을 피웠던 추억이 소환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이 두 편에서 우산은 사랑을 촉발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우산을 함께 썼던 기억은 참 따뜻한 추억의 강을 가졌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 강에서 물결이 되어, 흐름이 되어, 서로에게 흘러갔으리라. 서로를 적시며 함께 호흡했으리라, 먼 길을 가는 여정을 위해 동행하는 꿈을 꾸었으리라.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산을 쓰고 간다는 것, 그것은 건강한 상상이다. 결코 불온하지 않다.   
 
물론, 이성이 아닌 동성 간에도, 가족 간에도, 친구 간에도, 전혀 인연이 없는 타인끼리도 얼마든지 우산을 같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비를 피하며 우산을 쓰고 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혼자 쓰고 가는 우산보다는 더 자신의 몸을 적실 것이다. 더 불편해지리라. 그러나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을 주려고 같이 우산을 쓴다면, 우리들 마음속에도 쉬 마르지 않는 강물이 흐를 것이다. 
 
얼마 전 비 내리는 날, 어느 부처의 한 공무원이 무릎을 꿇은 채 고위 관료에게 우산을 받쳐준 일이 매스컴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이유는 이들의 처신과 더불어 우리가 알고 있던 우산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리라. 비를 피하고자 누군가와 같이 우산을 쓴다는 보통의 생각과는 괴리감이 생겼던 것. 우산은 누군가와 같이 쓸 때 따뜻한 동행이 된다. 그것이 우산의 순기능이다. 
 
우산의 ‘산(傘)’은 우산을 본뜬 모양이지만 글자를 구성하는 팔(八)과 십(十)이 팔십(八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목숨 수(壽)’와 합쳐지면 ‘산수(傘壽)’라는 단어를 낳는다. 80세를 뜻한다. 그 옛날에는 장수의 의미로 우산 ‘산’자가 쓰인 것.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비가 내린다. 밤이 어둡고 고요하다는 인식을 풀어헤치는 데 빗소리만한 것이 있을까. 가을비가 이 지상에 내려와 한바탕 신나게 놀고 있다. 어둠과 고요와 가뭄에 방치된 채 성장을 걱정하던 나무와 꽃에게는 더 없이 고마운 생명수다. 내일까지 비가 계속된다는 일기예보에 화답하려면 밤새도록 내릴 것이다. 여름 내내 강수량이 적어 제대로 된 깊이를 갖지 못한 중랑천은 이 비를 받아먹으며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리라. 이 비 그치면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 것이다. 비는 계절을 바꾸는 역할도 부여받고 있다.  
 
혹여 귀갓길에 전철 주위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우산 없이 서성이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쓰자고 말을 걸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풍경이 자연스런 사회, 그것이 뭐가 그리 어려울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세상은 자꾸만 동행을 거부하는 듯하다. 같이 우산을 쓰는 것, 나는 그것을 꿈꾼다. 음악처럼 흐르는 빗소리에 잠을 청하면서.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비즈니스일본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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