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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 ‘창궐’, 제목 의미 살리지 못한 아쉬움과 선택
2018-10-23 06:00:00 2018-10-23 06:00:00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영화 창궐에는 두 가지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우선 첫 번째는 야귀’(夜鬼). 문자 그대로 밤에 나타나는 귀신이다. 하지만 귀신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에 가깝다. 하지만 좀비도 아니다. 햇볕에 노출되면 죽는다. 산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다. 피가 빨린 사람도 야귀가 된다. 서양의 흡혈귀에 더 가깝다. 흡혈 바이러스 전염을 의심케 하는 장면도 영화에선 등장한다. 그렇게 야귀는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간다. 문자 그대로 창궐이다. 두 번째는 야욕이다. 역사적으로 반정 이후 집권기에는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항상 창궐했다. 그들은 언제나 반정 이후 혼란한 사회상을 틈타 권좌를 노려왔다. 불안한 왕권과 강력한 권신은 그래서 양립해 왔다. 그리고 야욕은 항시 그 시기에 창궐했다.
 
 
 
창궐에서 좀비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좀비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불안함을 그려낸 장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함을 시각화 시킨 좀비는 창궐속에서 직접적인 동력이다. 사실 이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자체 흐름에 브레이크를 거는 속성을 갖고 있다. 시각적으로 충만한 야귀떼의 창궐은 그 자체로도 공포다. 그 공포의 흐름은 상당히 압도적이다. 궁궐 안 한정된 공간 속에서 만연하고 집중된 공포는 혼란이다. 이건 설명이 필요 없는 시각적 대체제다. 그럼에도 영화는 주인공 이청(현빈) 그리고 반대편에선 악역 김자준(장동건)과 그 외에 여러 인물들을 통해 그 공포와 혼란을 설명하고 표현한다. 때문에 관객들에겐 동어 반복적인 흐름으로 작용돼 의외로 빠른 전개 방식에 의식적으로 브레이크가 걸리는 느낌을 받게 했다. 이건 창궐자체가 예상 밖으로 놓친 지점이자 오판이다. 제목처럼 창궐하는 야귀떼의 집단적 공포감과 공포 자체가 순도를 높이는 가장 짧은 시간 동안에 가장 광범위하게 퍼지는스토리적 흐름이 궁궐과 또 다른 공간인 제물포로 한정시킨 의도적 설정, 그리고 인물들의 대사적 설명으로 탁해져 버렸다.
 
야귀란 단어 자체 생경함과 사극이란 시대적 배경 그리고 확실한 프로타고니스트(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악역) 대결 구도는 창궐자체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눈에 띄게 살리지 못한 점은 예상 밖으로 부가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시선 분산이 발단이다. 선택과 집중에서 창궐은 인물을 선택했을 뿐 집중을 하지 못한 꼴이 됐다.
 
영화 '창궐' 스틸. 사진/NEW
 
이 영화 자체 본질적 안타고니스트’()는 당연히 쏟아지는 야귀떼. 그 야귀떼의 정점에 병조판사 김자준이 있다. 그는 혼란과 공포를 배경과 무기로 삼아 왕권 찬탈을 꿈꾼다. 세자인 소헌(김태우)까지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채 왕을 농락한다. 형 소헌의 죽음을 전해 듣고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강림대군 이청을 협박할 정도의 권력을 쥔 인물이다. 그는 완벽한 악이다. 사실 창궐속 악의 본질은 김자준에게 집중돼 있어야 옳았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고 야귀가 창궐한다. 쏟아지는 야귀들은 악의 분위기를 점점 더 분산시킨다. 급기야 궁궐 안을 가득 메운 야귀떼의 비주얼적 공포감은 악의 정점에 서야 할 김자준의 존재감마저 희석시키는 꼴이 됐다. 왕권 시대 권력 투쟁과 그 싸움 배경이 만들어 낼 혼란의 시대상을 야귀로 풀어내려 했던 감독 의도는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담아내려 했다. 그리고 명확해야 할 악의 색깔이 흐릿해지는 지점에선 창궐자체 의미마저 퇴색됐다. ‘권선징악대결에서 악은 반드시 강력한 포인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포인트가 도드라질 즈음이면 쏟아지는 야귀떼의 비주얼 충격으로 연신 희석되고 퇴색된다. 결과적으로 그 악에 대한 연민과 이해까지 희석됐다. 장르적 특성과 스토리적 특색을 모두 쥐고 가려 했던 연출의 오판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영화 '창궐' 스틸. 사진/NEW
 
물론 창궐이 희석과 퇴색의 의미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창궐은 사실 활극에 가깝다. 강림대군 이청의 장검 액션은 한국판 무협 사극의 그 어떤 액션과 비교해도 통렬함이 차고 넘친다. 창궐한 야귀떼의 신체를 자르고 베고 찌르는 현란함은 오롯이 주인공 현빈 한 명에게 집중된다. 개미떼처럼 쏟아지는 야귀떼 속을 칼 한 자루에 의지해 휘 집는 현빈의 칼 액션 하나는 보기 위한 액션으로선 거의 완벽에 가깝다.
 
창궐은 현빈에게 큰 역할을 줬고 그의 존재감을 돋보이게 하는 구성 방식을 택했다. 물론 관객도 잘생긴 현빈의 현란함에 매료될 것이다. 하지만 창궐에서 관객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닐 것이다. 제목처럼 창궐하는 공포와 끔찍함이다. 이 결과물에 호응한다면 비주얼에 대한 화답이 될 것이다. 반대로 고개를 돌린다면 답은 하나다. 제목이 잘못됐다. 특히나 이 영화는. 제목이 갖는 강렬함을 내용으로 끌어 내지 못한 잘못된 선택과 엉뚱한 집중이다. 오는 25일 개봉.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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