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테러와 미국의 총기 난사는 21세기가 세계화된 저강도 폭력의 세기가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끔찍한 상상이지만 예방책은 잘 보이지 않는다. 파리 테러는 멀게는 1·2차 세계대전 등 20세기의 전쟁과 가깝게는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 등 21세기 대테러전쟁의 부산물이다. 미국의 중동 개입전략과 이슬람세계 내부의 종교적인 갈등까지 맞물려 있다.
파리 테러 이후 영국은 시리아 공습에 참여하고 있고 독일도 2차 대전 이후 처음으로 파병을 결정했다. 공습과 파병이 테러를 근절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미국이 수렁에 빠지고 만 대테러전쟁이 입증했다. 불행히도 이슬람국가(IS) 격퇴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 격퇴가 된다 하더라도 그후에는 세계화된 네트워크형 테러가 또 다른 IS를 양산할 것이다. 테러 척결을 위한 해답은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를 리셋한 21세기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1899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시작된 유럽의 전쟁의 역사를 20세기에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19세기를 리셋하겠다는 열망이었다. 그러나 이런 열망에도 아랑곳없이 20세기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전쟁의 세기가 되었고, 우리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20세기를 앞두고는 만국평화회의라도 있었지만 21세기 전야에는 요란한 밀레니엄 행사만 있었다.
지난 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처에서 총기 난사가 발생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총기사고가 일어나는 나라이다. 미국에서 테러는 9·11을 통해 드러났듯이 대부분이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이 벌이는 만행이었고 지탄의 대상이다. 그에 비해 총기 난사는 대부분 미국 시민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데, 난사의 원인인 총기 소유는 헌법에 의해 보호되어 왔다. 미국에서는 테러는 테러고, 총기 난사는 총기 난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난사 사건은 그간의 총기 살인과 다르다. 테러로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테러가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고 가정해 보자. 용의자의 집에서 발견된 파이프폭탄 12개와 실탄 3000여발, 폭발물 장치 수백여개는 총기 살인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만하다. 테러가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안도할 수만은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시리아 난민보다 백인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돌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총기 난사와 테러가 뒤범벅이 되면서 위험과 불안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2015년 총기 사고 사망자 수가 3만3000여명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자살자를 제외한 1만3000여명이 총기 난사로 인한 사망자이다. 매일 35명이 총기 난사로 숨지는 셈이고 그 중에서 1명은 14세 이하 어린이다. 총기 사고는 교통사고 사망자를 초월해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내고 있는 분야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총기 사고이지만, 해결이 쉽지 않은 미국적 특성이 있다. 미국 수정헌법은 총기 소유를 허락하고 있다. 독립전쟁 당시 민병대들이 총기로 무장하고 영국과 맞섰기 때문에 총기소유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의 상징이었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흑인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백인들은 교외로 이주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소유가 늘었다. 많은 사망자가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총기 규제를 못하는 데는 미국총기협회(NRA)의 로비도 자리 잡고 있다. 미국 공화당 의원의 88%와 민주당 의원의 11%가 NRA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통계가 있다.
총기 사고가 나면 공화당 의원들은 늘 피해자를 위로하며 신의 가호를 빈다. 하지만 한 미국 언론은 신도 미국의 총기학살을 결코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국인들은 안전을 위해 총기를 소유하지만 총기소유 증가가 안전을 더 위협하는 악순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총기 사고와 테러를 구분하기도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러 버렸다.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분단이라는 불은 유럽의 테러나 총기 사고와 테러가 뒤범벅 된 미국의 상황만큼 복잡하지는 않다. 결정적인 차이는 해법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라가 안정되고 국민들이 편안한 21세기를 한반도에서는 꿈꿔볼 수 있다.
김창수 코리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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