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사내에 적립하던 퇴직금 제도를 대체해 도입된 퇴직연금 제도가 시행된지 9년이 지났다. 안전자산 위주의 자산운용과 낮은 연금 수령비율 등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지만,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가 올해 안에 1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양적인 성장을 이뤄낸 가운데 정부의 사적연금 활성화 방안으로 새로운 성장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이에 뉴스토마토는 퇴직연금 도입과 성장을 위해 발로 뛰어온 퇴직연금전문가 10인을 선정,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한다. [편집자주]
박준범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수석연구원(사진)은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올해 100조원을 넘어서고, 오는 2020년에 280조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박 수석연구원은 10일 뉴스토마토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8월 발표된 사적연금 활성화 조치로 시장은 급속히 성장할 전망"이라며 "2020년 시장규모는 활성화 조치 이전 전망치 226조원 대비 24% 증가한 규모"라고 밝혔다.
박 수석연구원은 "이는 1950년대 미국의 펜션 드라이버(Pension driver) 시대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가입율과 적립금 규모의 성장속도가 매우 빠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아직까지 질적 측면에서는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며 종합점수 50점을 줬다.
박 수석연구원은 삼성생명에 입사 후 법인영업본부 법인기획담당 등을 거쳐 퇴직연금연구소 연금제도센터장을 지냈다. 근퇴법 전부개정 위원, 금융위원회 사적연금 활성화 연구위원, 법제처 국민법제관(고용노동부 담당), 근로복지연구회 총무이사 등을 역임했다. 2008년 노동부장관상, 2013년 금융위원장상을 받았으며 저서로는 <퇴직연금 관리 총론(공동)> , <퇴직연금모집인 등록 표준교재(공동)> 등이 있다.
다음은 박 수석연구원과의 일문일답.
-퇴직연금이 도입된지 9년이 지났다. 도입 이후 현재까지 전반적 성과에 대해 평가한다면.
▲지난 시행 이후 현재까지 근로자 퇴직급여 수급권 보장 강화, 중간정산제도 제한, 개인형퇴직연금(IRP) 자동이전, 퇴직연금시장 규모 확대 등 일시금 제도에서 명실상부한 연금제도로서의 기틀이 마련됐다는 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다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원리금보장에 치우친 왜곡된 자산운용 실태, 실제로는 작동이 미흡한 가입자 교육, 소규모 사업장에서의 퇴직연금 도입 확산, 법정퇴직급여 제도로 인해 경직된 제도 운용, 실질적 노후생활이 보장되도록 연금화 기능회복 등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다. 아직은 질적측면에서 선진국의 절반수준에 그친 것으로 보이며, 종합 점수를 매긴다면 50점 수준으로 생각한다.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보나.
▲원리금보장에 치우친 극도의 보수적 자산운용 실태가 가장 큰 문제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89조인데 이중 92.4%인 82조2900억이 원리금보장, 실적배당은 6.4%인 5조6700억이 투자되고 있다.
제도 유형별 원리금보장 상품 비중을 살펴보면, 확정급여(DB)형은 98.2%가 원리금 보장에 투자되고 실적배당은 1.5% 불과하다. 확정기여(DC)형도 79.2%가 원리금보장형에, 19.3%가 실적배당형에 투자되는 등 원리금보장 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DB형의 경우 자산배분 의사결정을 회사내 담당부서에서 결정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담당자 및 관련 부서장 선에서 의사결정을 하다 보니 손실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워 원리금보장상품만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투자원칙 보고서' 의무화가 이번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에 반영됐다는 점에서 기대감이 크다. 투자원칙보고서는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법에 규정하고 있는 내용으로 작성 의무화시 퇴직연금이 근로자 노후자금이라는 중장기 본질과 속성에 맞게 적립금이 운용되는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퇴직연금 제도적 측면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인가.
▲퇴직연금 '연금화'가 되고 있지 않다. 금감원 통계에 따르면 올 3분기 연금수급 요건을 갖춘 55세 이상 퇴직자의 95.9%가 일시금으로 수령하고 연금으로 수령한 근로자는 4.1%에 불과하다. 명색이 연금제도이지만 실제로는 일시금 제도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미래의 연금소득보다는 당장의 일시금을 선호하는 특성과 그 동안 중간정산이 허용돼 적립된 퇴직급여가 연금화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라는 점도 그 원인이다.
이를 위해 이직시 IRP로 자동 이전된 퇴직급여에 대해서는 전액해지를 금지시키고, 55세 이후에 퇴직급여를 수령할 경우 반드시 일정비율 이상을 연금으로 수령하도록 하는 연금수령 의무화 조치가 필요하다.
-최근 논란이 됐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에 대해 전망한다면.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여전히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은 사안이다. 기금형제도가 우리나라 현실에 맞는 제도인가에 충분한 연구와 논의도 없었다. 현 시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려면 앞서 갖춰야 하는 선결과제들을 어떻게 구비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기금형 제도는 회사 바깥에 기금법인을 설립하고 수탁자에게 위임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수탁자에 대한 책임 부여가 중요하다. 선진국에서는 수탁자 책임에 대한 법적 조치가 많이 구비돼 있다. 이러한 선결과제들이 준비되지 않은 채 제도가 급하게 도입되면, 일본의 AIJ 기금법인 파산 사례에서 보듯이 근로자 수급권이 침해 받을 가능성이 크고, 퇴직연금 제도가 한순간에 무너질 개연성도 있다. 기금형 제도 도입은 수탁자 책임과 관련된 법적 조치부터 하나씩 충분히 시간을 갖고 제대로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앞으로 퇴직연금 시장을 전망한다면.
▲사적연금 활성화 조치로 인해 시장은 급속히 성장할 전망이다. 올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100조를 넘어설 전망이다. 2020년 시장규모는 활성화 조치 이전 226조원 대비 24%가 증가한 280조 규모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퇴직연금 도입 과정 혹은 도입 이후 현재까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건이나 순간이 있나.
▲2008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검토됐던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근퇴법) 전면 개정안에 중간정산을 제한하는 조항이 담긴 점이 국내 퇴직연금제도 발전에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본다.
당시 많은 근로자들은 중간정산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사항이지 이를 국가가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인식했다. 하지만 은퇴시점에 임박한 50대에서는 노후자금인 퇴직급여를 중간정산 해 대부분 생활자금으로 소진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노동부가 이해관계자를 지속적으로 설득해 중간정산 제한조치가 근퇴법 개정안에 담기게 됐다.
-퇴직연금이 노후소득보장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각 이해당사자들(근로자, 사용자, 금융기관, 정책당국 등)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퇴직연금 제1의 목적은 근로자의 노후소득 보장이다. 근로자의 경우 퇴직급여가 나의 소중한 노후자금이라는 인식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내가 퇴직하면 받는 퇴직 일시금이 아닌, 나의 노후를 책임지는 자금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가입한 제도 유형은 무엇인지, DC형이면 적립금 운용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대부분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가입자교육을 적극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용자는 근로자와의 상생차원에서 '종합적 기업복지제도'로 퇴직연금제도를 설계하고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기관의 경우 퇴직연금은 기존 판매채널을 활용한 단순한 금융상품 판매가 아닌 전문적 제도 컨설팅이라는 점에서 고객만족 차원의 인적·물적 투자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정책당국은 퇴직연금 시장경쟁이 건전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불완전 판매를 근절시키고,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해 국내 퇴직연금제도의 선진화를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문 연구기관 설치도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다.
서지명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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