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메모리 직원들이 성과급으로 1인당 최대 6억원을 받는다고 한다. SK하이닉스도 비슷하다. AI(인공지능) 대전환이 낳은 반도체 특수의 한 장면이다.
다른 쪽에서는 청년들이 AI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AI가 확산되자 기업은 신규 채용부터 줄인다. 서울의 한 중소기업이 연봉 4000만원에 사무직 1~2명을 뽑자 1800명이 몰렸다. 반도체가 역대급 호황을 누리는데도 지난 6월 제조업 취업자는 9만7000명 줄어 24개월 연속 감소했고, 청년 취업자는 44개월째 줄어 청년 고용률이 43.9%까지 떨어졌다(국가데이터처). 반도체가 성장을 이끌지만, 일자리는 줄어든다. 특히 청년 일자리가 심각하다. 올해 다섯 달 연속 취업자가 줄어든 연령대는 15~29세뿐이고, 지난 3년 사라진 청년 일자리 21만여개의 98.6%가 AI 고노출 업종에 몰려 있었다(한국은행).
성과급 6억과 1800 대 1. 이 장면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성과급 자제, 취업 예산 증액 같은 현안으로만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누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AI 대전환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이제 막 우리를 덮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것은 미래가 보내온 신호, 구조적 대책을 준비하라는 경고음이다. 그리고 그 대책은 한 정부, 한 정당이 혼자 만들 수 없다. 사회 전체가 합의해야 만들 수 있다.
지난 4월30일 경기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 본사 모습. (사진=뉴시스)
미래가 보내온 신호, '승자독식 블랙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 합계는 지난 6월 평균 53.2%, 코스피의 절반을 넘어섰다. 2024년 하반기만 해도 20%대였다. 미국에서도 'M7'이 S&P500의 3분의 1을 차지한다(10년 전 12%). 부(富)는 소수의 거대 기업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승자독식은 늘 있었지만 과거의 일등은 추월당하기라도 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용자가 많을수록 데이터가 쌓이고 서비스는 정교해지며 이용자가 더 몰린다. 네트워크와 데이터, AI가 스스로 격차를 키우고 고착시킨다. 골드만삭스의 진단처럼 "새로운 기술은 역사적으로 집중을 분산시킨 적이 없다. 오히려 강화해 왔다." 그래서 '승자독식 블랙홀'이다.
그나마 지난 100년간은 기업이 벌면 임금이 가계로 흘러 소비가 되고 다시 매출이 되는 선순환, 성장의 낙수(落水)가 있었다. 지금 이 통로가 막혀간다. 과거 세계 최대 기업 US스틸과 GM은 수십만 명을 고용했지만, 오늘날 세계 최대 기업 엔비디아는 3만6000명으로 시가총액 5조달러를 만든다. 메타는 8만명이 안 되는 인력으로 연 2000억달러대 매출을 올리면서도 올해 수천명을 감원했다.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을 줄이는 것, 이것이 새 시대 기업의 문법이다. 한국은행 산업연관표를 보면, 최종 수요 10억원이 만드는 취업자는 2005년 20명에서 2022년 8명으로 반 토막 났고, 반도체는 2명에 불과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구조가 바뀐 것이다. 빨아들이는 힘은 세졌는데 내보내는 통로는 좁아졌다. 기업의 성공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더 성장해야 한다. 문제는 그 성공이 자동적으로 '우리의 성공'으로 이어지지만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몫은 어디에 있는가
이 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빅테크의 부는 대부분 데이터에서 나온다. 그 데이터는 기업이 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수억 명의 검색과 클릭, 유튜브에만 한 달 40시간을 쓰는 우리의 시간이 쌓여 빅데이터가 된다. 이 수익에는 기업의 몫, 개인의 몫, 인터넷·GPS처럼 판을 깔아준 공공의 몫이 겹쳐 있다. 기업의 혁신은 분명 크다. 그러나 길 내는 일은 동네 사람들이 함께 했는데 통행료는 포크레인 주인이 독차지하는 게 맞는가. 토머스 페인은 사회가 함께 일군 부를 나누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정의(正義)'라고 했다.
세금이라는 통로가 있다. 조세부담률 17.6%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최하위권이니 더 걷긴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블랙홀을 바로잡을 만큼 올리는 게 가능할까. 세계가 디지털세로 10년 넘게 표류 중이다. 각자도생, 주식을 사서 올라타는 길도 있다. 그러나 1억원 넘는 주식을 가진 상위 7.7%가 개인 주식의 78%를 쥐고 있다. 출발선부터 평등하지 않다.
익숙한 통로가 모두 막혔다는 것, 이것이 이 문제가 현안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증거다. 낡은 지도로는 새 땅을 걸을 수 없다. 새 지도를 우리가 함께 그려야 한다.
지난해 10월29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모습. (사진=뉴시스)
기술혁신에는 늘 사회개혁이 응답했다
기술을 만든 사람들이 답을 주지 않을까. 일론 머스크는 '보편적 고소득'을, 샘 올트먼은 AI의 부를 모두에게 나누는 세상을, 빌 게이츠는 주 3일 노동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술 혁신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지, 그것을 민생의 혁신으로 잇는 길을 고민해 온 사람들이 아니다. '기술이 다 해결해 주는 시대'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 설계하고 합의를 만들어야 온다.
인류 문명사가 증언한다. 기술 혁신이 치고 나가면 반드시 인문사회의 대응이 함께했다. 철기·화폐·도시혁명에 대응해 '축(軸)의 시대'가, 산업혁명에는 계몽과 시민혁명이, 에너지혁명 이후 독점과 제국주의에는 뉴딜과 복지국가가 응답했다. 그렇다면 정보화·지능화 혁명 앞에서 우리의 대응은 무엇인가. 블랙홀을 넘어설 철학과 제도, 좀 더 똑똑한 국가와 유능한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들은 과학기술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철학과 인문사회, 정치와 경제의 몫이다.
미래전략, 시간이 없다
미래의 신호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미래 전략'이 필요하다! 이 미래는 먼 훗날의 원(遠)미래가 아니라 5년, 10년 안의 근(近)미래다. 시간도 없다. 세 개의 시계가 동시에 돈다. 'AI의 시계', 생성형 AI는 인터넷보다 여덟 배 빠르게 일터로 확산된다. '인구의 시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2036년이면 노인이 30%를 넘는다. '연금의 시계', 18년 만의 개혁으로 기금 소진을 8년 늦췄을 뿐이다.
위기는 친절하지 않다. 헤밍웨이의 말대로 파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온다. "천천히, 그러다 갑자기." 이미 시작됐다. 구직을 1년 늦게 시작한 청년은 평생 실질임금이 6.7% 줄어든다(한국은행). 청구서를 미루면, 그걸 받아 드는 것은 지금의 청년과 태어나지 않은 세대다. 이런 문제는 예산 하나, 법안 하나로 풀리지 않는다. 미리 준비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지금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위기와 기회는 한 끗 차이
비관이 아니다. 위기와 기회는 한 끗 차이다. 같은 국면이, 준비한 나라에는 도약대가 되고 놓친 나라에는 낭떠러지가 된다. 대한민국은 엄청난 기회를 맞고 있기도 하다.
첫째, 반도체 특수는 행운이 아니라 고비마다 이어온 인내 투자와 기술 혁신의 결실이고, 우리에게 실탄이 정말 필요한 때 효자 노릇을 하게 됐다. 둘째, 앞으로 산업을 주도할 피지컬 AI 판에서 한국은 유리하다. 제조업 로봇 밀도 세계 1위(국제로봇연맹), 인구당 AI 특허 2년 연속 세계 1위, 주목할 만한 AI 모델 수 세계 3위(스탠퍼드대 AI 인덱스). 제조업의 힘과 AI·로봇의 능력을 함께 갖춘 나라는 사실상 중국과 대한민국뿐인데, 중국은 미국·유럽과의 관계에 막혀 있다. 셋째, 정치의 조건도 갖춰졌다. 집권 초기 대통령의 신뢰 자산, 다수 의석의 집권 여당, 무엇보다 준비된 국민.
이만한 조건이 갖춰진 때가 언제 있었나 싶다. 자산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고, 리더십이 비어 있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 앞서 SK하이닉스의 AI 반도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행정의 일, 정치의 일
국민성장펀드, 메가프로젝트 등 정부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행정은 속성상 당면 현안과 반도체·AI·에너지 등 기술산업 전략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더 근본적인 한계도 있다. 정부가 하는 일은 걷힌 세수와 주어진 집행 권한 안의 일이다. 진짜 과제는 그 너머에 있다. 일자리가 줄면 근로소득은 어떻게 되나, 청년은 어디서 숙련을 쌓나, 자산 없는 사람은 자산소득 시대를 어떻게 사나, 막대한 재원은 어떻게 만드나, 기금을 몇 배로 키우고, 민간의 돈을 참여시키고, 세금을 더 내고, 그 막대한 재원을 어디에 먼저 쓸지 정하는 일, 이런 과제는 현안 대응이나 기술 투자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도 없다. 국민이 동의해야 가능하다. 그 규모와 순서, 로드맵을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정답의 문제가 아니라 합의의 문제다.
그래서 관료·행정보다 정치가 핵심이다. 미래를 내다보고 국민의 불안을 마주하며 사회 전체의 합의를 만드는 일, 그게 본래 정치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 정치는 '누가 권력을 잡느냐'까지만 열심히 달린다. 권력투쟁은 중간 정차역이고 목적지는 국민의 삶을 바꾸는 일이다. 국민은 미래가 불안한데, 정치는 권력만 놓고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중간 정차역에 내려서 멱살잡이 하느라 목적지를 잊은 것처럼 보인다.
여든 야든, 미래를 놓고 싸워라
민주당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안 대응'만 잘해서는 절반의 성공이다. 전환기 국정에서는 특히 '미래 대응'이 중요하다. 이재명정부의 뿌리는 '기본소득'이었다. 일자리와 소득의 미래를 내다보고 던진 미래 전략이었고 그것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 지금 민주당의 임무는 기본소득 논쟁을 넘어 AI 대전환 시대의 미래 전략을 세우는 일이다. 이번 전당대회야말로 계파의 지지가 아니라, 미래 전략을 논쟁하는 마당, 그것을 감당할 능력을 검증하는 무대가 돼야 한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은 지금도 윤석열정권의 위헌 불법 계엄을 두고 '정상 참작'과 '단절' 사이에서 싸운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미래를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는 야당이 생존할 수 있겠는가.
전환기 역사에서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늘 미래 전략이었다. 1860년대 일본보다 대국이었던 청나라는 미래 대응 실패로 40년 후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똑같은 대공황 앞에서 미국은 뉴딜로 응답했지만, 무능한 정치의 독일은 나치에 미래를 넘겼다. 정치가 제 몫을 못 하면 그 대가는 언제나 국민과 다음 세대가 치렀다.
여든 야든 미래 전략을 놓고 싸워야 한다. 국민이 관심 없다 말하지 말라. 국민은 제 삶에 닿는 의제라면 언제든 관객석에서 운동장으로 내려온다.
김종민 무소속 의원이 지난 5월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국회세종의사당 마스터플랜 국제공모 당선작 발표 및 시상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래전략 공론장'을 크게 열자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 '초격차 기술' 위에서 ‘초격차 민생’을 해결하는 전략, 이게 우리의 목표다. 기업도 정부도 '초격차 기술'과 '초격차 산업'을 말한다. 미래 전략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가야 한다. 초격차 기술은 필연적으로 '초격차 민생'을 낳는다. 청년은 생애 첫 숙련의 기회를 잃고, 자산 없는 사람은 자산소득 대잔치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투 트랙으로 가야 한다. 기업이 '초격차 기술'에 투자하는 만큼, 사회는 '초격차 민생'을 이야기하고 여기에 투자해야 한다. ‘초격차 민생 전략’은 당연히 ‘초격차 기술 전략’을 포함한다. 기술과 산업, 기업이 성공하지 않고, 민생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기술의 혁신, 기업의 성공은 과연 민생의 혁신, 국민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성과급 6억과 1800 대 1, 두 장면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는가."
함께 답을 만들어가자. 이 공론장의 주인은 정치인만이 아니다. 사회적 합의는 시민의 목소리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완벽한 답을 갖고 출발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 뜻이 모이면 시범사업으로 검증하면서 합의를 넓혀가면 된다. 본격적인 공론을 위해 미래전략 설계도, '대전환 뉴딜'을 제안한다. 다음 글에서 그 전체 개요를 제시한다.
김종민 무소속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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