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한국의 외채상환 능력과 산업구조를 볼 때 제철소 건설은 시기상조다."
1968년 대한민국에서 첫 쇳물을 퍼올릴 자금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우리 정부는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의 보고서에 청천벽력을 맞는다. '한국은 그간 제철을 해본 적도 없고 변변한 산업시설이 없다. 철강수요도 부족해 제철소를 지어봤자 무조건 실패한다'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뒤로한 채 1968년 4월 경상도 구석의 모래밭에 들어선 작은 제철공장은 지난해 연매출 60조원을 거둔 세계적 철강사가 됐다. '제철보국(製鐵報國)' 네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퍼올린 쇳물로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내달 1일 창립 50주년을 맞는 포스코의 이야기다.
1968년 포항 영일만에서 뿌리내린 '산업의 쌀' 철강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제철소를 시찰하는 모습.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포스코는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창립했다. 포스코는 박정희 정부가 1965년부터 건설을 구상한 후 공장규모와 부지선정, 자금마련 등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탄생한 국내 최초의 일관제철소다. 일관제철소란 고로에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것부터 철판 등 최종 철강제품까지 한번에 모두 만들 수 있는 종합제철소다. 일제시대에도 국내에는 제철소들이 존재했지만, 가내수공업 형태의 철물주조 공장들이 전부였다. 산업의 모든 영역에서 반드시 쓰여야 하는 말 그대로 '산업의 쌀'인 철강은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포항 영일만의 백사장에 들어선 포스코를 통해 대한민국은 '철다운 철'을 제대로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펼칠 수 있게 됐다.
포스코는 자본과 기술, 경험도 없는 '3무(無)' 상태에서 첫발을 뗀 지 5년 만인 1973년 드디어 조강 103만톤 규모의 첫 고로 설비를 준공했다. 포스코에 따르면, 이 시기 임직원들은 이른바 '롬멜하우스'로 불린 건설사무소에서 쪽잠을 자고 영일만의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고로 건설에 매진했다. 포항1고로로 명명된 이 설비는 포스코의 초대 회장인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만약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했을 만큼 집념의 산물이었다. 그해 6월9일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던 날 박 명예회장과 임직원들은 만세를 부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했다.
사진/뉴스토마토
영일만 신화를 광양서 재현…'신포스코 시대'
포스코는 1981년까지 포항에서 4기의 고로를 준공하면서 연간 850만톤의 조강능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1970년대는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적극 육성하면서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9%를 웃돌던 때였다. 특히 1977년에는 '수출 100억달러'까지 달성하는 등 연평균 수출성장률은 30%대를 넘는 초고도 성장기였다. 경제규모가 급속히 팽창하자 산업전반에서 철강수요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포스코는 포항 외 지역에 제2 제철소를 확보해야 할 상황이 된다. '영일만의 신화'를 전남 광양으로 옮겨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됐다. 1983년 광양제철소 문을 연 데 이어 4년 뒤 광양1고로를 준공하는 등 1990년대까지 광양에 최신형 종합제철소를 완비하게 됐다. 아울러 1986년 제철보국의 정신을 '교육입국'으로 연계한 포스텍(포항공과대학교)을 개교하고 산학체제까지 구축하게 됐다.
2005년 7월3일 포항제철소 3고로가 누계출선량 5000만톤을 달성했다. 사진/뉴시스
1992년 10월, 30여년간 포스코를 이끈 박태준 회장이 물러나면서 포스코는 다시 전환기를 맞게 됐다. 박 회장이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포스코의 외형을 키웠다면, 그가 물러난 후에는 새로운 방향전환이 필요했다. 이에 1993년 3대 회장으로 취임한 정명식 회장은 '신포스코'를 주창하며 효율적인 업무시스템 확보, 고객지향의 판매력 강화, 핵심기술 조기 완성, 최적설비 구성 등 내실을 다질 실천과제를 설정하고 포스코 개혁을 가속화했다. 포스코는 1994년 뉴욕증시, 이듬해 런던증시에 잇따라 상장되면서 아시아 최고를 넘어 글로벌 최고 경쟁력을 가진 철강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포항1고로 이후 40년만에 매출 1458배
2000년대 들어 포스코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첫번째는 1997년 닥친 국제외환위기(IMF)였다. 일찍부터 경영효율화를 추구한 덕분에 포스코는 재벌대기업과 굵직한 공기업들이 무너져갈 때도 무사할 수 있었다. 2000년 민영화는 또 다른 도전이었다. 그해 10월 포스코는 이전까지 산업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 36%를 매각하고 완전히 민영화된다. 명칭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에서 포스코로 바뀌고 새로 태어난다. 2003년 6대 회장에 취임한 이구택 회장은 민영화 이후 자립생존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국과 베트남, 인도 등에서 해외 생산설비 확대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 사옥. 사진/뉴시스
2010년대 들어 포스코의 화려한 시절은 사라지는 듯했다. 대외적으로 중국은 가격·물량 공세로 철강의 과잉공급을 유발했고, 미국은 보호무역 기조로 통상압박을 가해왔다. 국내에서는 조선업과 건설 등 주요 수요처의 경기가 불황에 빠졌다. 2008년 7조1739억원이었던 영업이익은 2014년 3조2135억원까지 줄었다. 민영화 이후 역대 회장마다 제기된 '주인없는 기업의 낙하산' 논란은 정권출범 초기 등 주기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포스코는 위기 때마다 돌파구를 찾았다. 최근 1~2년 사이 전통적 철강기업에서 탈피해 배터리와 자원 등 신성장동력을 적극 발굴하고 기업 전반의 스마트화를 추구하면서 새 도약을 시작했다. 특히 기업 전반의 스마트화는 '스마트 포스코'로 대변될 정도다. 포스코는 철강은 물론 건설과 IT, 에너지 등 그룹사 사업 전반에서 스마트화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철강에서는 스마트고로, 건설에서는 스마트홈 등이 대표적이다. 포스코는 1973년 첫 쇳물을 생산한 후 지난해 매출 60조6551억원, 영업이익 4조6218억원을 달성했다. 매출은 반세기만에 1458배나 늘었고, 올해 2월 기준 계열사 40개를 거느린 재계 6위의 대기업집단이 됐다. 한국경제를 이끌며 반세기 동안 성장한 포스코는 제2의 도약을 위한 역량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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