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정치 블랙홀’에 갇힌 국정원
2015-07-23 10:41:46 2015-07-23 10:41:46
“대통령직속 정보기관이 더러운 해킹이 들통나면 매번 공동성명 발표하고 야당을, 국민을 위협할 것인가? 그것이 당신들의 애국인가? 그대들 같은 정보원에게 고문당한 내가 부끄럽다, 이제는.”
 
새정치민주연합 은수미 의원이 올린 페이스북 글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좋아요’가 3500개나 달려 은 의원이 올린 다른 글들에 비해 10배가 넘는 반응성을 기록했다. 고문을 당할 때조차 국가정보기관의 존재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는데, 무엇이 더욱 은 의원을 부끄럽게 했을까.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정원 직원일동 명의의 성명을 보면서 굉장히 기이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이 국민과 야당을 비판하며 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은 사실 개그 프로그램이 아니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교수는 22일 자신의 트위터에 국정원 직원 집단 성명, 원장이 직접 결재 논란이라는 기사를 링크하며 “코미디를 해라, 왜 나와서 데모도 하지. 마스크 쓰고”라는 글을 올렸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의 모토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제 거꾸로 가겠단 건가. 정말 일개 시민단체로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이 해외첩보를 비롯한 최고급 정보 수집이 아니라 떡볶이 블로그나 메르스 정보사이트에 악성코드를 심어 국민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것이어서 극단적인 자기비하 증세에 빠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부끄럽지 않을 방법이 별로 없다.
 
국가간 경쟁 환경이 날로 첨예해지고 한국처럼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실력 있는 국가 정보기관의 존재 필요성을 부정하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짐 에이브람스 전 편집국장의 말처럼 “잠시 쉬려고 한숨만 쉬어도 뒤처지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우리 국정원은 비밀 정보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 삼류정치의 한복판에서 떠날줄을 모르고 있다.
 
2013년 내내 대선 불법개입 사건으로 여야 정당보다 더 큰 관심을 받았던 것이 국정원이다. 세월호 참사 때도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처럼’ 다시 국정원이 정치의 중심에서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적어도 정보기관이 이렇게 오랫동안 뉴스의 중심에 서는 것이 바람직할 가능성은 제로다. 그런데 여전히 국정원의 빅데이터 언급량은 압도적이다. 트위터, 블로그 등에서 국정원을 언급한 문서는 하루 6만건을 상회하고 있다. 자살소식이 전해지던 19일에는 10만건에 육박했다. 추경예산이나 광복절 사면 같은 이슈를 뒤덮고 있다.
 
흔한 음모론에 행간의 여력을 보탤 생각은 없다. 나의 관심은 어떤 방식으로 국정원을 정치의 중심에서 몰아낼 것인가에 있다. 어떻게 하면 국민들이 자신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의 정보기관으로부터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이 국정원 해킹 사건의 본질이다. 그러려면 성명 따위를 발표해 스스로의 위상을 동네 뒷골목에 내던질 일이 아니라 진정한 해법을 내놔야 한다. 최소한의 고백과 제도개선, 국정원법 개혁 같은 강도 높은 혁신안을 내놓아도 돌아선 국민들의 마음을 잡을까말까 할 판에 협박이라니, 타임머신을 타고 개발독재시대로 회귀라도 했단 말인가.
 
국정원은 하루빨리 정치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정보의 중심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상을 밝히고 잘못된 관행을 벌하며 재발방지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여당인 새누리당도 어정쩡한 옹호가 국정원을 도와주는 길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세련되지 못했다. 여당 대표가 '해킹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을 취객처럼 읊조린다. 오히려 새누리당이 정보기관의 불법적 사찰 의혹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그렇게 신뢰를 얻은 상태에서 국정원의 필요성을 강조해야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드 스노든의 희생 위에 미국 의회는 지난 6월, 국가안보국(NSA)의 국민에 대한 도감청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미국자유법’을 통과시켰다. 9.11테러 이후 테러 방지 명목으로 질주했던 ‘애국법’이라는 이름의 전방위 국민감시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번 국정원의 국민감시 의혹 사건을 해결하려면 국내정치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입법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안 그러면 내년, 후년에 치러질 총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은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호명될 것이다. 나아가 국회 정보위원회와의 관계설정을 엄밀하게 해서 무소불위의 국정원도 일정한 감시와 통제를 받게 해야 한다. 미국 상하원 정보위원회 역할을 참조하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NSA, CIA, FBI 등 미국 16개 정보기관이 뭉친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는 매년 미래예측보고서를 작성해 미 의회에 제출한다. 의원들은 새로운 법안을 만들 때 이 보고서를 참조한다. 물론 미국 정보기관의 불법 정보수집과 감시활동도 공공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권의 안보가 아닌 국가의 안전과 미래를 위한다는 방향만은 분명해 보인다.
 
국민의 정보인권 보호뿐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국정원 개혁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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