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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정책포커스)엔저 장기화…미국 인내심 어디까지
일본, TPP 협상에 엔저 걸림돌 될까 우려
2015-06-10 15:12:52 2015-06-10 15:12:52
세계 경제 성장을 주도하던 미국이 갑자기 동네북 신세가 됐다. 미국이 달러 강세로 곤욕을 치르는 동안, 다른 주요국들은 수출 경쟁력이 살아날 무대가 마련됐다며 쾌재를 부르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반사이익을 거둘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국가는 일본이다.
 
지난 1년간 달러 가치가 주요국 대비 18% 상승하는 동안, 엔화 대비로는 22%나 올랐다. 지난주에는 엔화 대비 달러 환율이 13년 만에 최고치인 125.86엔까지 솟구쳤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양적완화 정책과 미국 경제 회복 기대감이 맞물려 ‘강달러·약엔’ 추세가 가속화된 것이다. ‘잃어버린 20년’을 만회하기 위한 아베의 승부수가 통하는 모양새다.
 
◇아베 경기부양 효과로 인플레 기대치 상승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2012년 말에 취임한 이후 ‘금융완화’, ‘공격적 재정지출’, ‘구조개혁’ 등 3가지 경기 부양책을 연달아 단행했다. 아베만 ‘돈풀기’에 나선 것이 아니었다. 지난 2013년 4월 취임한 구로다 일본은행(BOJ) 총재는 직함을 받기 무섭게 전면적 양적완화에 돌입했다. 구로다는 물가상승률 2%를 목표로 잡고 양적완화 규모를 연간 60~70조엔에서 80조엔으로 늘렸다. 둘의 행보에는 근린궁핍화(近隣窮乏化) 정책, 즉 이웃나라 거지 만드는 정책이란 꼬리표가 붙기도 했지만, 아베와 구로다는 끝까지 경기 부양을 고집했다. 그 결과, 조만간 물가가 상승세로 전환될 것이란 기대감이 싹텄다. BOJ가 매분기 국민들을 상대로 실시하는 ‘생활의식에 관한 앙케이트’ 조사에 따르면 1년 후 물가가 오를 것으로 예측한 응답자는 2012년 당시 50%에 불과했으나, 2013년 1분기 들어 80%대까지 올라섰다.
 
물가전망과 더불어 무역지표 또한 경제 회복세를 암시하고 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지난 4월 수출액은 전년보다 8% 늘어난 6조5515억엔으로 8개월 연속 증가세를 기록했다. 대미 수출은 전년보다 21%나 늘었다. 엔화 약세로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실적이 개선됐다는 분석이다. 기업의 실적이 살아나자 지난 4월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 실수령액이 2년 만에 처음으로 (+)플러스로 돌아섰다. 이처럼 부양책으로 촉발된 엔저가 기업 실적과 임금에 청신호를 보내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본의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0%에서 1.4%로 상향 조정했다.
 
 
  
◇강달러, 미국 성장에 발목
 
일본이 엔저로 세계 시장에서 선방하는 동안 미국은 죽을 쒔다. 지난 4월 미국의 무역 적자는 514억달러로 월간 기준으로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8년 10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달러 강세로 수출이 주춤해진 반면, 수입은 늘었기 때문이다. BOJ와 유럽중앙은행(ECB)이 공격적인 양적완화를 단행한 데다 미국 경제 성장을 점친 이들이 달러 매수를 늘려 강달러가 가속화된 것.
 
사실 이전까지 미국 당국자들은 달러 랠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국이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출이 미국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미국 경제의 원동력은 GDP에서 70%를 점유하는 소비지출이다. 즉 내수가 경제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수가 기업 실적 악화로 쪼그라들 위기에 처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1분기 어닝시즌 동안 프록터앤겜블(P&G), 존슨앤드존슨, 펩시코, 페이스북, 델타항공은 모두 실적 악화의 원인으로 달러 강세를 꼽았다. 기업들이 해외에서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고용이 줄거나 임금이 동결될 수밖에 없다. 이는 가처분 소득 감소로 이어져 소비지출을 막는 원인이 된다. 소비지출 감소 여파에 미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3.1%에서 1.4%로 곤두박질쳤고 내년 성장률은 3.0%에서 2.8%로 하향 조정됐다. 마켓워치 국제부문 칼럼니스트 렉스 너팅은 “미국 경제 부진의 주요 원인은 달러강세”라며 “기업 실적 악화로 고용이 부진해졌다”고 평가했다.
 
◇일본, TPP 협상 위해 적당한 엔저 추구
 
미국은 일본이 얄미울 것이다. BOJ의 양적완화가 달러 강세를 부추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달러 강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편은 현재로썬 딱히 없다. 연방준비제도(Fed)가 연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달러 강세가 오히려 더 심화될 여지가 많다. 1985년 프라자합의 때처럼 일본 대표를 불러다 놓고 엔화 가치를 강제로 인상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라 미국 당국자들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7일 G7 회의 석상에서 “강한 달러가 문제"라고 언급했다. 백악관은 관련 내용을 즉각 일축했지만,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가 현재 달러 수준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일본이 미국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을 체결하기 위해 엔저 수위를 조절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TPP는 미국과 일본, 호주, 캐나다, 칠레, 베트남 등 12개 국가가 참여하는 다자간 경제동맹이다. 일본 내각은 엔저를 가속화하기 보다는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미 의회 내 TPP 반대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함이다. 엔저가 심화되면 미·일 중심의 TPP 협상이 미 의회의 비준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일본이 이 협상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최근 중국 주도의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시아를 아우르는 투자은행을 설립한 것은 일본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이런 가운데 하반기 달러·엔 환율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미쓰이스미토모은행은 115엔으로,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는 135엔으로 각각 내다봤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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