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강예슬 기자] 지난 10일 수정·가결된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안 제목에 '인권 침해 방지'라는 표현이 추가됐습니다. '대통령 방어권' 보장이라는 내용이 부각되니 인권위가 무리하게 나서 대통령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처럼 오해한다는 이충상 인권위원의 주장을 반영한 것입니다. 당시 이 위원은 '대통령 인권 침해 방지'를 앞세워야 권고안의 설득력이 강해질 것이라고도 제목 변경을 제안했습니다.
인권위가 지난 11일 저녁 발표한 보도자료 속 권고안 제목은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 권고의 건'에서 '계엄 선포로 야기된 국가적 위기 관련 인권침해 방지 대책 권고 및 의견표명의 건'으로 변경됐습니다. 하지만 일부 위원들은 권고안 제목이 변경된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회의에서 제목 변경에 관한 사항을 명시하지 않고,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인권위가 무리하게 안건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절차 공정성 시비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인권위원도 몰랐던 안건 제목 변경
이충상 인권위원은 10일 오후 서울 중구 인권위에서 열린 2차 전원위원회(전원위)에서 권고안 가결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안건 제목이 거창해 오해를 산다며, '인권 침해'라는 단어를 추가하자는 제안이 나왔습니다.
이 위원은 "(안건이) 만약 가결 된다면 안건 제목을 국가적 위기 극복 대책이 아니라 인권침해 방지 대책으로 바꿨으면 한다"며 "(권고안) 제목이 좀 거창하기 때문에 인권위가 막 엄청나게 나서는 것으로 오해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대통령 방어권 보장이라고 하니깐, '(권력이) 센 대통령 권리 뭘 이렇게 보장에 앞장서냐'라고 한다"며 "방어권 보장보다 인권 침해 방지하자, 대통령 인권 침해 방지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설득력이 강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앞서 지난 1월 공개된 원안에 "대통령의 방어권을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부정적 여론이 일자 일종의 프레임 전환을 제안한 겁니다. 이 위원의 말은 그대로 수용됐습니다. 인권위가 11일 늦은 오후, 전날인 10일 수정·가결된 주문 내용과 함께 바뀐 제목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한 겁니다.
일부 위원은 안건의 제목이 바뀐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남규선 위원은 12일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인권위 전원위는 제목을 포함한 의안을 5일 전에 인권위원들에게 배포하도록 돼 있고, 검토를 하고 온 뒤 심의를 하게 돼 있다"며 "(제목 결정 권한을) 누구에게 위임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한 명의 위원이 주장한 내용을 합의 절차를 안 거치고, 수정하는 것은 심의·의결 원칙에 맞지 않다"고 비판했습니다. 지난 10일 전원위에서 안창호 위원장은 원안의 주문 중 일부를 삭제, 변경하는 과정에서 인권위원의 동의 여부를 물었을 뿐 안건의 이름이 바뀌는 것에 대해선 동의를 구한 적은 없습니다.
인권위 결정서에는 안건 통과를 반대한 위원들의 의견, 즉 소수의견을 첨부하기로 했지만 인권위가 일방적으로 보도자료엔 소수의견이 빠졌습니다. 원민경 위원도 <뉴스토마토>에 "반대 의견을 쓰기로 했던 안건이라, 반대 의견까지 나온 뒤 이후 결정서가 나오면 그때 보도자료를 내는 게 위원회의 원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왜 박성재 장관만 탄핵 각하?" 묻자, 돌아온 답
"내용이 많아져, 제일 심한 것 하나만 골라"
절차 논란은 2차 전원위 회의 과정을 보면 예견된 일입니다. 10일 수정·가결된 주문에는 "법무부장관 박성재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등에서 탄핵소추권 남용 여부를 적극 심리해 남용 인정시 조속히 각하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표명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하지만 해당 내용은 그날 처음 제안된 것이었습니다. 전원위 개최 전 회의 안건을 미리 주고 검토하도록 하는 원칙을 따르지 않은 겁니다.
당시 전원위 회의에서 강정혜 위원은 "오늘 박성재 장관에 대한 탄핵 각하 의견 표명 추가 서면을 받았다"며 "행정안전부라든지 다른 장관들도 있는데 특히 박성재 장관에 대해서만 탄핵 각하 의견을 표명하시는 이유가, 그 차별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충상 위원은 "확고하다. 탄핵소추의결서를 다 읽어봤는데, 박 장관에 대한 탄핵소추의결서가 가장 권한 남용"이라며 "제일 소추권남용이 심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서 2명, 3명, 4명에 대해서 한덕수 국무총리에 대한 소추도 남용의 성격이 짙은데, 그러면 너무 내용이 많아져서 제일 심한 것 하나만 골랐다"고 말했습니다.
김용직 위원이 윤석열씨나 박성재 장관의 경우 당사자가 진정하지도 않는 내용을 왜 인권위가 직권으로 나서 권고하느냐고 질문하자 이충상 위원의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이 위원은 "제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나 대법관들에게도 제가 제일 깊게 연구해서 가르쳐 줄 위치에 있다"며 "전문성이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김 위원은 "이충상 위원께서 명명백백하게 맞는데, 그 정도면 말씀 안 하셔도 각하니 걱정하지 마라"며 권고안을 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자 이 위원은 "헌법 재판관들의 각하에 대한 관념이 없거나 박약하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김용직 위원이 "우리는 (헌법재판관에) 가르쳐줄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이 위원의 입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안창호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에서 열린 2차 전원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전두환·노태우 재판해 봐 피부로 느껴...피고인 된 대통령은 슈퍼 을"
직접 듣고도 믿기 어려운 궤변도 오갔습니다. 인권위가 내란수괴 혐의를 받는 대통령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직권으로 권고안을 내는 것이 맞는지를 두고 공방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입니다. 김용직 위원은 "대통령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약자라고 보기 좀 어렵다"며 "대통령이 나서지 않고, 대통령에는 수많은 변호사들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대통령이 약자라는 이유로 직권으로 우리가 의견을 내는 것은 좀 넌센스"라고 주장했습니다. 인권위가 권고안을 내는 것에 반대한 겁니다.
그러자 이충상 위원은 "원래 대통령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면서도 "지금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집행 중으로 형사 피고인이고 탄핵 피청구인이다. 법원 재판부 또 헌재 재판부에서 철저히 약자"라고 반박했습니다. 이어 "재판부가 슈퍼갑이고, 피고인, 피증인은 슈퍼 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제가 전두환씨와 노태우 전 대통령을 재판해 봤기 때문에 피부로 느꼈다"고 덧붙이기까지 했습니다.
남규선 위원은 "(이 위원은) 인권이라는 이름을 가져와서 정치적 행위를 하려 하는 것"이라며 "지금 대통령의 계엄선포를 옹호하고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하라는 그런 요구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 아니냐"고 소리 높였습니다.
하지만 권고안의 가결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인권위는 헌재 소장에 △윤씨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심리시, 형사 소송에 준하는 엄격한 증거조사 실시 등 적법절차 원칙 준수 △박성재 법무부 장관의 탄핵심판 사건의 경우 (국회의) 탄핵소추권 남용 여부를 적극 심리해 남용 인정시 조속히 각하를 권고했습니다. 법원과 수사기관에는 "대통령 윤석열 등 계엄 관련 피고인들에 대해 형사법의 대원칙인 불구속재판 원칙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인권위의 주문은 수사기관의 수사를 불법수사로 지칭하고, 형사법 절차를 지키라는 윤 측 대리인단의 입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찬성표를 던진 이들 대다수는 윤석열씨가 대통령 임기 중 임명했거나, 여당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강예슬 기자 yea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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