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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R&D 예산 삭감을 연구 풍토 개혁의 계기로 삼아야
2023-10-24 06:00:00 2023-10-24 06:00:00
지금 대학가와 과학계는 공황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정부가 내년도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충격이 큽니다. 정부는 2024년도 R&D 예산을 25조9159억원으로 편성했는데, 올해 31조778억원보다 16.6% 감소한 수준입니다. 이공계 교수들의 학술연구기반을 지원하는 ‘이공학 학술연구 기반구축사업’의 내년 예산은 올해 5290억원보다 25.8% 줄어든 3927억원입니다. 절반 수준으로 감액되거나 심지어 폐지된 연구지원 사업도 있습니다.
 
정부가 예산을 삭감한 이유는 그동안 R&D 예산이 급격히 증가했지만 두드러진 성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R&D 예산은 10조원에서 30조원 규모로 세배나 늘었습니다. 우리나라 R&D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4.93%로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습니다. 이처럼 막대한 R&D 투자가 기술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OECD도 지적합니다. 
 
올해 59조원 규모의 세수 오차가 예상되면서 내년도에 긴축재정을 수립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 방만하게 운영되는 R&D 예산을 감축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사실상, R&D 예산 삭감은 33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예산만 삭감한 것이 아니라 연구과제 쪼개기, 예산 나눠먹기, 건수 채우기, 실적 공유하기 등등을 고질적 병폐로 꼽으며 국가 R&D 예산의 누수 주범으로 ‘이권 카르텔’을 지목한 것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률적 R&D 예산 삭감뿐 아니라 삭감 사유에 대한 반발이 거셉니다. 나눠먹기식 연구비의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하지만, 이권 카르텔이라는 낙인찍기는 과하다는 것입니다. 
 
정부 연구비를 받아 열심히 연구에 전념하는 수많은 연구자를 도매금으로 묶어 부도덕하고 무능하다고 매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연구비의 비효율적 집행을 비난하는 것을 넘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가에 관한 근본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대학의 이공계 교수들은 국책과제의 연구비 지원에 목을 맵니다. 랩(실험실)을 운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공계 연구는 주로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며 포닥(postdoc, 박사후연구원)을 정점으로 박사, 석사로 구성된 연구원들이 실험을 진행합니다. 스타급 유명 교수의 실험실은 작은 공장 규모로 수십명의 연구원이 여러개의 과제를 위한 실험에 종사합니다. 
 
연구원의 인건비를 지급하고 실험장비와 재료를 구입하는 데 많은 자금이 소요됩니다. 정부 과제를 따오지 않으면 실험실을 운영할 수 없고, 실험실이 안 돌아가면 논문이 나오지 않으며, 논문이 안 나오면 과제를 따지 못해 실험실 운영 경비를 충당하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반면에, 대형 국책과제를 수주하면 많은 연구원을 고용해 좋은 실험결과를 얻을 수 있고 이를 국제 저명학술지에 발표하여 연구업적이 높아져 학계에서 명성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런 업적과 명성을 이용해 후속 국책과제를 따와 실험실에 투입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교수의 관심은 온통 연구 자체보다 연구과제 수주에 쏠립니다. 연구과제를 따오느냐 못 따오느냐가 생존과 명성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수는 연구과제를 따오는 ‘찍새’ 역할하고 대학원생들은 이를 받아 연구를 수행하는 ‘딱새’ 역할을 합니다. 교수들은 거의 로비스트처럼 밖에 나가서 활동하며 연구과제와 연구비 배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스타급 교수치고 골프 실력이 준프로급이지 아닌 경우가 드뭅니다. 
 
랩 안에서는 공장이 돌아가듯이 대학원생들이 실험을 진행하여 연구결과를 내고 보고서와 논문을 작성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교수는 랩에서 무엇이 돌아가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한때 줄기세포 연구로 유명세를 탄 일류 국립대학 교수가 랩에서 줄기세포가 하나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몰랐듯이 말입니다. 웃기는 것은 이런 허장성세 격의 스타급 교수들이 정부에 과학기술 정책을 자문하며 새로운 연구과제를 만들고, 이를 본인이 따오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고리를 카르텔이라 부를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정부의 R&D 지원에만 의존하는 연구풍토는 지속성이 없으며 이번의 예산 삭감을 통해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도 연구비 지원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대학을 통제하는 관행을 버려야 합니다. 대학이 등록금을 올리지 못하는 이유는 국책과제 평가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입니다. 등록금을 올려서 국책과제를 받지 못하면 이공계 실험실 운영과 대학원생 유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연구자들을 비난하기보다 이런 풍토를 조성한 연구비 집행방식부터 반성하고 이를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이 범정부 차원의 혁신성장을 위한 큰 그림이 없이 단순히 예산을 배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OECD의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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