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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수의 한국철학사 2화)신화시대 한국 철학 특질과 ‘바람의 흐름’
2023-03-13 06:00:00 2023-03-17 09:08:48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조선 사람’의 비주체적인 면모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利害)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신채호, <낭객(浪客)의 신년(新年) 만필(漫筆)>, 《동아일보》, 1925년 1월 2일]
 
신채호 선생의 비판은 준엄합니다. 이 논설은 일제 강점기에 육체적?정신적으로 노예 상태에 빠진 조선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자성(自省)의 아픈 채찍질입니다. 
 
단재 신채호. 사진=필자 제공
 
조선의 역사에는 공자와 석가와 예수와 맑스가 들어오면, 거기에 다른 사유를 적극적으로 보태 조선의 공자, 조선의 석가, 조선의 예수, 조선의 맑스로 만들고자 씨름하고 고투한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선배들 또한 있었습니다. 이 연재는 이런 존경스러운 선배들의 끈질기고 대담한 사상적 고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위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발언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한국 철학사에서 신채호 선생의 시각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부처와 공자와 예수를 넘어서려 한 선배들의 피땀 어린 고투의 흔적을 역사에서 지워버리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투에 바로 우리가 한국 철학사에서 읽어 내어야 할 역사와 인생의 모든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화 중심주의’에 대한 불만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철학 하면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등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은 성실하고 훌륭한 학자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철학사의 주요 텍스트들을 차례차례 섭렵한 저로서는, 이들이 한국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혀도 좋은가 하는 점에 대해 깊은 회의를 지니게 됐습니다. 그들은 주희 성리학을 국내에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연구를 활성화시키기는 했지만, 철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혁신적 아이디어를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한국 철학 하면 이황이나 이이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한국 철학 연구가 ‘성리학(性理學) 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황이나 이이는 좋은 성리학자로 꼽을 수는 있겠지만, 한국 철학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국 철학자로 꼽을 수는 없습니다. ‘성리학 중심주의’는 ‘중화 중심주의’의 유가(儒家)적 변형태입니다. 이런 ‘성리학 중심주의’의 시각에서 한국 철학사를 재단해서는, 한국 철학사가 지닌 고유한 특질을 전혀 드러낼 수 없습니다.
 
한국 철학사에서 한국 철학의 융합적 통섭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 거인들로는 고운 최치원, 원효 스님, 서포 김만중,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오주 이규경, 혜강 최한기, 수운 최제우 등이 있습니다.
 
대각국사 의천의 원효에 관한 시: “경전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논(論)을 지어 큰 뜻을 밝히니/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이룬 업적과 짝을 이루네/ 오늘날 게으른 후학들은 도무지 아는 게 없어/ 마치 이웃집에 공자가 살아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같다네(著論宗經闡大猷/ 馬龍功業是其?/ 如今懶學都無識/ 還似東家有孔丘) 목인 전종주 교수의 서예 작품. 사진=필자 제공
 
이들이 사유한 화쟁(和諍)과 탕평(蕩平)과 대동(大同)의 철학은 적어도 우리 공동체에서 일반적인 상식이 되어야 합니다. 가령 통속적인 영역, 예를 들자면 현재 통행 지폐의 도안에 들어가 있는 이황, 이이의 초상화를 원효, 다산, 혜강, 수운 등의 초상화로 대체할 정도까지 되어야 마땅합니다.
 
고려 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은 당시에도 이미 원효 스님과 같이 위대한 스승이 정당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경전의 근본 가르침을 바탕으로 논(論)을 지어 큰 뜻을 밝히니(著論宗經闡大猷)/
  마명(馬鳴)과 용수(龍樹)가 이룬 업적과 짝을 이루네(馬龍功業是其?)/
  오늘날 게으른 후학들은 도무지 아는 게 없어(如今懶學都無識)/
  마치 이웃집에 공자가 살아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것과 같다네(還似東家有孔丘)
  [《大覺國師文集》卷二十, <讀海東敎迹>]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사진=필자 제공
 
저는 대각국사 의천의 심정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웃집에 공자가 살아도 그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오늘날의 한국 불교 조계종은 원효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의 깨달음을 이어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요? 
 
저는 오늘날 한국 불교 조계종을 대표하는 이른바 ‘큰스님’으로 꼽히는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의 대표 저작인 《본지풍광(本地風光)》(합천: 장경각, 1990)을 읽고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은 선종(禪宗)의 역사에서 전해 내려온 100칙(則)[‘칙(則)’이란 화두를 세는 양사(量詞).]의 화두에 대한 앞선 스님들의 풀이와 성철 자신의 풀이를 담은 ‘상당(上堂) 법어집(法語集)’입니다. 그런데 성철이 가려 뽑은 100칙의 화두는 예외 없이 모두가 100% 중국 선사(禪師)들의 화두입니다. 한국 선사의 화두는 단 한 칙도 실려 있지 않습니다.
 
성철은 《본지풍광》에서 이 땅의 고승들의 행적은 단 한 획도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중국 선사들의 화두 100칙만을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가령 성철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요임금의 하늘 순임금의 해[요천순일(堯天舜日)]”(성철, 앞 책, 56쪽) ‘요천순일(堯天舜日)’은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태평성세”라는 뜻입니다. 
 
성철은 “인간 세상에는 동쪽으로 흐르지 않는 물이 없다”(人間無水不朝東, 성철, 32쪽.)는 식의, 중국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편협한 글귀까지 자기 언어로 받아들여 되뇌고 있습니다. 중국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이기 때문에 “모든 강물은 동쪽으로 흐른다”는 말이 속담이 될 수 있지만, 한국은 반대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이기 때문에, 중국과 반대로 모든 강물이 서쪽으로 흐릅니다. 왜 중국에서나 통용되는 이런 관용어까지 앵무새처럼 따라한단 말입니까. 
 
성철(性徹) 스님. 사진=필자 제공
 
원효만 불교계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가령 몽테뉴나 파스칼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시대를 뛰어넘은 깊은 사색과 성찰을 담은 독특한 에세이를 남긴 서포 김만중과, 공자의 사색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은 사유를 전개한 조선 후기 혜강 최한기[이 연재 32회에서 다룰 예정]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여전히 일천하기만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이들의 현대적 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면, 그 작업을 누가 대신 하겠습니까.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식의 이른바 ‘국뽕’ 혹은 국수주의의 시각을 ‘자기중심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철저하게 배격하며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 철학사에 등장한 고유한 관점이나 특질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식의 논의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앞서 말했지만, 우리 공동체가 인류의 도도한 사유의 강물에 보탤 수 있는 특질이 있다면 그것을 잘 탐구해서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삼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융합과 통섭의 시도는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서의 이질적인 필치와 질감과 이미지를 융합한 이응로(1904~1989) 화백의 작업과, 결이 다르고 음색이 이질적인 동서의 음악을 융합한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선생의 작품 또한 통섭과 융합의 전통과 무관하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유의 전통을 이어받음으로써 오늘날 한반도 분단체제와 사회 분열을 넘어서는 평화 체제 구축의 비전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종교와 이념과 종족의 차이로 인해 끊임없이 대립하고 극단적으로 투쟁하는 현대 세계에 새로운 공존과 평화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회차에서는 지난 오천 년 동안 이어져온 한국 철학의 통섭적, 융합적 디엔에이가 어떤 여정을 거쳐왔는지 함께 여행해보기로 하겠습니다.
 
■ 필자 소개 / 이상수 / 철학자·자유기고가
2003년 연세대학교 철학 박사(중국철학 전공),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 2003~2006년 베이징 주재 중국특파원 역임, 2014~2018년 서울시교육청 대변인 역임, 2018~2019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대변인 역임. 지금은 중국과 한국 고전을 강독하고 강의하고 이 내용들을 글로 옮겨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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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3 07:14 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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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세계종교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오도하던 불법 점거시대라, 그당시에 쓰여진 인쇄물들은, 전부 왜곡되거나 약간 비틀어진 내용들입니다. 국권을 강탈당해, 신채호같은분이 쓴 내용도, 조선.대한제국이 발간한 정사가 아닙니다. 그때는, 강제포교종교인 일본신도(일본의 국교,불교의 파생신앙),불교,기독교(일본의 극소수 신앙)만 포교할수 있던 시대라, 교육.종교.문화측면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정사로 착각하면 않됩니다. 조선.대한제국의 기준과 법, 역사만이 정사영역입니다. 을사조약.한일병합은 무효입니다

2023-03-13 07:11 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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