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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익도의 밴드유랑)넬, '조명의 우주' 그리고 '대탈출'
15~18일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
무대 조명 억대 투자…아크릴 조명 직접 창작
시대의 질문 환기…"빨리 마스크 벗는 그 날 오길"
2022-09-21 16:00:00 2022-09-21 16:00:00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시작은 레드. 10분할의 넓적한 빨간 빛들이 어둠을 쪼개고 있었다.
 
잠시 뒤 암전, 그리고 흰 빛과 이내 눈에 들어오는 400여개의 블레이드 조명 장치들, 무대 뒤를 가득 채운 압도적인 규모에 여기저기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는 연출 미학이 어디까지 공연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종이'와도 같았다.
 
공연장에 입장하자마자 위에서 직사하던 빨간 빛들의 군열은, 서서히 '실사(實寫)'의 강점을 드러냈다. '매버릭'(영화 '탑건' 속 주연 탐 크루즈의 콜사인)이 다크스타를 조종하며 천천히 거대 양 날개를 펴듯. 
 
'조명의 우주', 16일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 대기실에서 만난 넬 멤버들, 김종완(보컬)·이정훈(베이스)·이재경(기타)·정재원(드럼)은 "무대 전체를 비현실적인 조명으로 뒤덮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의 멤버들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정재원(드럼), 이정훈(베이스), 이재경(기타), 김종완(보컬)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억대에 달하는 투자액으로 이들은 조명의 우주를 건설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국내외 대중음악계에서 처음 시도되는 아크릴 조명을 직접 창작했다. 보컬 김종완은 "아크릴 재료에 일찍부터 관심이 있었다. 3개월 가량 연습실을 드나들며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멤버들과 테스트했다"고 설명했다. "오히려 규모가 작은 무대를 조명들로 꽉 채운다면 분명 압도적인 느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도 했다. 
 
실제로 이날 공연 초반 '희망고문'-'드림캐처' 같은 초반 곡들 때는 미세한 빛의 조명 통제로 기대감을 서서히 고조시키다가, '오늘은'-'유희'-'도쿄'로 이어지는 구간부터 무대는 급기야 불빛 세례들로 본격 출렁대기 시작했다. 회전 가능한 블레이드 조명(길다란 막대 형태의 조명 장치)이 기하학적 움직임으로 명멸하는 수백개의 '백색왜성'이라면, 사이사이 빨간 정사각형 네모 형태의 400여개 아크릴 조명들은 태양계 '행성'처럼 정박돼 공연장을 수놓았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원래는 클럽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많은 클럽들이 사라지는 바람에..."(김종완)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는 염세적인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우리 공연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렇게 재개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빨리 마스크를 벗는 그 날이 오길 바랍니다."(이재경)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코로나 블랙홀'의 해들을 뒤로 하고 이제 대탈출의 시기다. 4일 간 총 1400여명, 총 5000여명의 관객이 몰려든 이번 공연에는 흔히 넬 하면 떠오르는 '기억을 걷는 시간' 같은 대표 타이틀곡들은 없었다. 대신 데뷔 23년차 디스코그라피 중 록적인 곡들을 추려, 조명과 사운드의 성수를 붓고 축성했다.
 
'Whatever'-'Unhappy truth'(미공개곡들)부터 'My Reason'-'Minus'(메이저 데뷔 전 'Speechless' 수록), '부서진 입가에 머물다'-'Marionette'-'Last advice' 같은 서태지컴퍼니의 괴수인디진 시절 곡들, 그리고 'A.S'('힐링 프로세스' 수록)-'Cliff Parade'('Slip Away' 수록)-'소멸탈출'('Newton's Apple' 수록)-'무홍'('Colors In black' 수록), 'Still Sunset'(올해 8월 발매 최신 싱글)까지... 시기별 앨범의 곡들은 현란한 조명들과 뒤엉켜, 흡사 제임스웹의 우주 사진 같은 신선한 광경들을 만들어냈다.
 
"여태까지 해 온 넬의 음악이 그저 '디스코그래피' 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바이오그래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음악에게도 저는 '인격'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김종완)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1999년 결성. 2002년 서태지의 인디레이블 ‘괴수인디진’ 합류. 2016년 독립레이블 스페이스보헤미안 설립. 2001년 ‘Reflection of’와 ‘Speechless’로 시작해 지난해 ‘Moments in between’까지 총 9개의 정규앨범을 낸 이들은 대중음악 공연의 미답지를 개척해왔다. 직접 본 메탈리카, 디페쉬 모드, U2 공연 같이 ‘온 몸에 전율이 일던 경험’을 추구한다. 기승전결의 알찬 공연 구성과 화려한 무대 연출은 해외 록, 팝스타들의 내한무대를 보듯 현란하다. 최근 거리두기 해제로 예매권이 동나고 있는 대중음악 페스티벌에서도 섭외 1순위다.
 
대중음악계에서도 사운드와 무대 조명, 감각적 영상, 연출로 정평이 난지 오래다. 특히 매년 크리스마스에 열리는 ‘CHRISTMAS IN NELL'S ROOM(넬스룸)’은 2003년부터 이어져온 이들 대표 브랜드 공연이다. 조향까지 신경 쓸 정도로 세심한 기획력은 한국 대중음악 공연 문화를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의 넬 사운드’로 편곡하거나 새로운 연출을 위해 아이디어 회의를 수개월에 걸쳐 진행하는 것은 '직업으로서의 음악가'인 이들에게는 필수다. 과거에도 김종완은 본보 기자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새롭게 편곡해야 하기 때문에 힘든 것도 사실이지만 프로뮤지션이라면 그 정도의 노력은 너무 당연한 과정"이라며 "결국 좋은 공연을 만드는 것은 아이디어 싸움"이라고 했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좋은 공연은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는 공연이다. 무대 위의 신박한 생각이나 행동들을 봤을 때, 그에 숨은 미묘한 의미가 무엇인가 행간을 읽는 과정에서 시대의 질문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좋은 공연과 그렇지 못한 공연을 결정한다.
 
이 날 좋은 공연임을 직감한 여러 순간들이 있었다. 무대 위 조명장치들이 뭘까 관객들이 궁금해 할 때, 그것들이 소리를 눈 앞의 생생하게 살아움직이는 물질로 전환할 때, 다시 관객들의 탄성과 웃음으로 번져 팬데믹 대탈출을 꿈꾸게 될 때. 
 
"(곡 '부서진 입가에 머물다' 제목을 한 팬이 지어줬다는 이야기를 하며) 음악을 처음하던 20대 시절, 우리도 정말 분노 같은 것이 많긴 했거든요. 지금도 그런 시절에 있는 분들이 이 자리 계실지 모르겠으나, 버티다보면 언젠가 또 좋은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는 계기를 찾게 되실 수도 있을 겁니다."(김종완)
 
니체의 말처럼 인간은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일 때 빛난다. 끝내 마하 10의 한계치를 뚫고야 마는 매버릭처럼. 설령 산산조각나더라도 죽지는 않으니까, 그게 결국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자산일테니까.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케인 제독인가. 넬의 다크스타는 오늘도 우주를 열고 있다.
 
지난 15~18일 서울 마포구 신한pLay 스퀘어 라이브홀에서 열린 넬의 단독 공연 '더 그레이트 이스케이프(The Great Escape)'. 사진=하쿠나마타타·스페이스보헤미안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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