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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성폭력 피해자 진술, ‘피해자다움’으로 판단해선 안돼”
"피해자 '진술 신빙성', 상황 고려해 판단해야”
2022-09-18 09:00:00 2022-09-18 14:10:56
[뉴스토마토 조승진 기자]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피해자다움'을 잣대로 둬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로 판단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다고 18일 밝혔다.
 
재판부는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성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라며 “피해자의 진술 내용이 논리와 경험칙에 비추어 합리적인지 여부는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상황에 기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통상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험칙에 어긋난다거나 합리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한 증거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심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배척했다며 “원심판결을 파기 환송한다”고 판시했다.
 
법원에 따르면 70대 남성 A씨는 2019년 1월 채팅어플 통해 30대 여성 B씨와 채팅을 주고받다가 실제 만나기로 약속했다. A씨는 “너무 춥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 모텔에 들어가자. 날 믿어라”라고 말하며 B씨를 모델로 데려갔다.
 
하지만 A씨는 모텔에서 일방적으로 B씨에게 50만원을 건내 준 뒤 피해자를 강제 추행했다. 사건이 벌어진 뒤 B씨는 해바라기센터에 전화해 피해를 상담했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후 성폭력 피해를 알게 된 지인이 거듭 경찰 신고를 권유하자, B씨는 A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유일한 직접 증거인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는지 여부다. 1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해 A씨에게 유죄 판단을 내렸지만, 2심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무죄 판단을 내렸다.
 
이는 △해당 사건 당일 B씨가 즉시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점 △모텔에 나서기 전 A씨의 얼굴에 묻는 립스틱을 닦아준 점 △모텔에서 나온 이후 A씨의 차를 타고 자신의 차가 주차된 곳까지 돌아온 점 △수사기관에 A씨의 제안에 동의해 모텔에 들어갔다고 진술한 점 등을 1심과 2심에서 각기 달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1심은 ‘피해자다움’을 규정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통상 성폭력 피해자라면 취하지 않았을 만한 행동을 규정하고, 이를 모든 사건에 적용할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1심은 “이를 ‘성인지 감수성’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B씨가 통상 성폭력 피해자에 비해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라면서도 “B씨의 지능검사 결과 전체적으로 저조한 지적 능력을 보이고 있고, A씨에게 심적 의지를 하는 등 피해자의 심리 및 정서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B씨가 원조교제 의심을 우려해 얼굴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줬다는 진술 등 딱히 허위로 내용을 의심할 만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고 피해사실을 대부분 구체적이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라며 “A씨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한다”고 판시했다.
 
반면 2심은 B씨의 태도가 강제추행을 당한 피해자로 보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는 기존의 잘못된 통념을 극복하고 합리성과 경험칙의 내용을 개별적, 구체적인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상황에 기초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보다 구체화 한 것”이라며 “향후 유사한 사건 판단에서 하급심에 대한 지침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뉴시스)
 
조승진 기자 chogiza@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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