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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박시백 노란들판 디자인팀장 "중증장애인 근로기회 제공위한 노력 이어갈 것"
2015-07-31 06:00:00 2015-07-31 06:00:00
청각장애 1급인 직원은 입모양으로 뜻을 유추하는 구화를 통해 동료들과 대화한다. 근육마비로 오른손만 쓸 수 있는 직원은 마우스를 움직여가며 디자인작업을 해낸다. 이들 직원이 어려워하는 작업은 다른 동료들의 도움으로 해결한다.
 
"40대 초반의 장애인 야학학생이 술자리에서 '죽기전에 일 한번만 해보고 싶다'는 푸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저희 노란들판은 세워졌습니다. 사회적기업에 대한 개념도 없을 때 한 야학교사의 의지를 발판삼아 4명으로 시작한 회사가 17명 규모로 성장했죠."
 
실사출력·인쇄디자인 전문 사회적기업 노란들판은 지난 2006년 3월 노들장애인야간학교(노들야학)가 장애인의 노동권과 자립생활에 대한 고민 끝에 설립한 회사다.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현수막'을 표방하는 노란들판은 지난 2007년 고용노동부로부터 실사출력 분야 수도권 1호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으며 2014년부터 올해까지 2년 연속 서울시 우수사회적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 야학교사의 의지 속에 4명으로 시작
 
노란들판이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디자이너도 없이 노들야학 전·현직 교사 출신 비장애인 두 명과 노들야학 학생 장애인 두 명이 현수막 출력기계를 한 대 구입해 시작했다. 시작 전 경기도 수원에서 현수막 사업을 하고 있던 한 천주교 재단에서 1개월간 연수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노란들판 설립 3개월 후에 합류, 지금까지 10년째 일하고 있는 박시백 디자인팀장(사진)은 합류 당시에는 지금처럼 오래 일할 계획은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첫 직장을 그만두고 재충전을 하던 중에 당시 팀장으로부터 잠시만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대학 다닐때 디자인을 전공했고 야학교사까지 했던 인연이 있어서 3개월만 도와주기로 하고 왔는데 결국 10년을 있게 됐네요."
 
박시백 노란들판 디자인팀장. 사진/최한영 기자
 
박 팀장은 디자인과 교육에 집중하고 다른 팀장들은 대외업무를 처리하는 식으로 초창기 자리를 잡아갔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각종 문구 등의 접수를 잘못받거나, 출력을 잘못하는 등의 웃지 못할 사례들이 많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란들판은 장애 특성을 고려하고 각자의 장점을 살려 일하는 방식을 택했다. "서서 일하기 어려우면 디자인 업무를, 손 사용이 자유로우면 현수막 마감 업무를, 통화가 가능하면 접수 업무를 하는 식으로 일을 나누고 있어요. 단순히 장애인을 고용한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직원들이 서로 챙겨주며 각자의 장점을 살리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팀장급 직원들에게 업무가 과중되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노란들판 직원이 현수막 출력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노란들판
 
노란들판의 가장 큰 위기는 고용노동부의 인건비 지원이 끊긴 2012년 경 찾아왔다. "사회적기업 등록을 통해 인건비 지원을 5년 간 받아왔어요. 그 돈은 저희 수익이 아니었음에도 거기에 취해 있었던거 같아요. 위기를 느끼지 못하다가 지원금이 사라지는 해를 1년 앞두고 계산을 해보니, 월 500만원씩의 적자가 나는 것으로 예상되더군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들야학 교사 출신의 경영이사를 영입해 거래선을 늘리고, 식대와 팀장들의 월급을 삭감하는 등의 위기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원가절감 노력에 더해 매출이 늘어난 덕에 지원금이 끊긴 첫 해부터 적자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취업지원프로그램과 무해고방침 통한 상생지속
 
이 와중에 근로의향이 있는 장애인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하는 '잡자(Jobja) 취업지원프로그램'을 마련, 지금까지 세 차례 진행했다.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은 중증장애인에게 박 팀장이 직접 1대1 교육을 실시하고 업무를 맡기는 노력이 지속됐다. 프로그램 이수자 중 가능성이 보이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채용하고 있다. "두 번째 잡자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사실 사람을 뽑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었고, 기존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일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고민을 하다가 채용을 결정했죠. 다행히 매출이 올라가며 걱정을 해소할 수 있었죠."
 
취업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직원을 채용하면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전에 교육을 실시하고 오후에 업무를 하려니 정말 힘들더군요. 안타까웠던 것은 대학 디자인교육만 해도 처음 1~2년은 다양한 공부를 하다가 나머지 기간동안 컴퓨터로 결과물을 만드는 식으로 진행되거든요. 그런데 이 분들을 속성으로 가르치다 보니 정해진 틀에 익숙해져서 습관대로 디자인을 하는 경향이 생기더라고요." 이 문제는 매달 진행하는 디자이너 워크숍을 통해 개선하고 있다.
 
노란들판은 '한 명도 해고하지 않는다'는 경영방침을 세우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을 지킨다는 것이다. 건강문제로 직원이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최대한 사람을 잡기위해 노력한다. "진행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직원이 있어요. 예전보다 업무에 애로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업무 조정을 통해 업무에 대한 부담을 줄여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기타 작업장의 특성에 맞는 배려도 하고 있다. "장애 특성상 정기검진이나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1주일에 한 번, 3시간여 범위 내에서는 연차 등을 쓰지 않고 병원에 다녀올 수 있게 하고 있고요."
 
◇3년 전부터 인쇄업무도 본격 진행
 
이렇게 닦은 기반을 발판으로 노란들판은 기존 실사출력 업무와 함께 3년 전부터 출판인쇄업무도 병행하고 있다. 인쇄업무는 박 팀장이 전담한다. "인쇄업무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기존 실사출력 디자인 업무에서 손을 뗄 수 없었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장애인 디자이너 중에서 책임감 있는 한 분을 실사출력팀장으로 세우고 저는 인쇄업무에 전념하게 된 것이죠." 노란들판의 매출액 중 인쇄업무는 3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노란들판의 인쇄디자인 포트폴리오. 사진/노란들판
 
내년이면 창립 10주년을 맞는 노란들판은 지금까지 시민사회단체와 공공기관을 주 고객으로 발전해 왔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인권을 지키기 위한 시민단체 '반올림'과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에서 의뢰한 현수막과 인쇄물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 해야할 일을 했다는 자부심도 느낀다고 박 팀장은 설명했다. 10주년 기념 행사로 지금껏 나왔던 작품 중 중요한 것들을 모아서 작은 전시회를 개최할 계획도 있다.
 
올해 들어 비장애인 직원 2명을 추가채용한 노란들판은 앞으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일하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작업장으로 남고자 한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모두를 위한 들판'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만들었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 않는 사업장으로서 지난 10년을 서두르지 않고 함께 걸어왔습니다. 이제 또 다른 10년을 맞이하면서 보다 튼튼한 사업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아울러 8월 1일부로 새로운 사무실을 얻어 직원 근무여건 개선에도 나섰다. "직원 중 5명을 투표로 뽑아 사무실 이전 근무환경 개선팀을 만들었어요. 업무기기 외에 커피머신 등 필요로 하는 물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예산 500만원도 배정했고요. 공사하는 사진을 모바일메신저로 공유하며 직원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앞으로의 각오도 다지고 있습니다."
 
박 팀장은 향후 장애인을 대상으로 대학과정에 준하는 디자인 교육기관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나타냈다. "잡자 취업지원프로그램은 분명 의미있는 활동이지만 단기간에 디자인 교육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기본 바탕이 없었기에 발전시간이 더딘 부분도 있었고요. 쌓아오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전문가들을 교수진으로 모시고 연간 15명 선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해보고 싶어요. 비장애인과 동등한 취업기회를 갖게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에는 장애, 비장애의 구분이 없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노란들판이 추구하는 가치니까요."
 
최한영 기자 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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