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넬의 ‘소통적 화면 세계’, 축제가 되다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물들인 밴드 넬의 연말 공연
입력 : 2018-12-28 16:40:05 수정 : 2018-12-28 16:40:05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무대 앞 입체적인 큐브형 LED에는 좌, 우, 위 사방 시시각각으로 영상이 냇물처럼 흘렀다. 잿빛 도시에서 어딘가를 향해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는 회색 인간과 반짝이는 몇몇 기둥 위로 넘실대는 파도의 일렁임, 칠흑 같은 우주 공간에서 유영하는 오로라빛 은하들과 장렬한 하얀 빛으로 세상을 뒤덮는 백색왜성.
 
큐브 공간 위로는 더 큰 규모의 ‘ㄷ’자를 시계방향으로 30도 기울인 형태의 LED가 레고조각을 맞추듯 끼여 있었다. 이 화면은 주로 큐브 속 영상들을 더 큰 스케일로 확장시켜주거나 관객과의 교감을 실시간으로 쭉 훑어주는 역할을 했다. 
 
지난 24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인 넬스룸(CHRISTMAS IN NELL'S ROOM)’. 사방에서 음악과 흘렀던 소통적 화면 세계, 그것은 꼭 30여년 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보는 것만큼이나 현란하고 강렬한 전율이었다. 
 
매체가 인간 위에 군림할 것이라던 관념을 멋지게 비튼 백남준처럼, 밴드는 화면을 한껏 활용했다. 다채로운 영상과 음악, 거기에 더해진 뜨거운 관객들의 반응이 그들의 소리를 ‘소통’으로 환원하고 확장시켰다. 단순한 공연 이상의 입체적인 체험적 세계이자 6개월 전부터 밴드가 직접 기획하고 스탭들과 만들어 낸 공간. 대화면과 맞물려 뿜어지는 음악들이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과 결합하니 성대한 축제가 됐다.
 
대화면의 압도적인 스케일은 그들의 음악을 재차 변주시켜주는 또 다른 ‘악기’ 같았다. 
 
이날 저녁 8시 ‘Slip Away’의 건반 소리로 시작한 밴드는 ‘Boy-X’에서 대화면의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본격적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겉보기에는 심플하고 단순한 구성 같았던 무대가 일순간에 파란색 섬광으로 물드니, 관객들의 함성이 초반부터 폭발했다.
 
‘Fisheye Lens’ 때는 일렁거리는 신스 사운드에 맞춰 ‘ㄷ’자 LED에 손가락 문양이 3D 화면으로 비춰지는가 하면, ‘백색왜성’ 때는 칠흑 같은 우주 공간에서 유영하던 별들이 서서히 무리를 짓더니 가운데 별 하나가 장렬한 하얀 빛으로 공연장 전체를 뒤덮기도 했다. 
 
한참 시각적인 모험에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면 후각적이고 촉각적인 체험이 이어졌다. 공연 초반부터 달콤하게 코를 간지럽히던 향은 은은한 로즈향으로 바뀌었다가, 폭죽 향이었다가, 또 어떤 때는 시원한 쿨워터향이 됐다. 어느 정도 적응될라 싶을 때쯤 느닷없이 또 새로운 향이 코 끝에 와 닿아 있었다. 형형색색의 나비 종이와 반짝이는 색종이 가루들은 약동하는 축제의 기운을 폭발시킨 촉매제였다.
 
밴드의 19년 노하우가 집약된 만큼 공연에는 ‘기승전결’식의 흐름이 있었다. 초반 잔잔한 건반 울림으로 시작한 공연은 차츰 소리를 쌓다 증폭시키고, 다시 또 조용한 순간을 만들어가고 하는 식의 전개로 이어졌다.
 
공연 절반이 흘러갈 때쯤 멤버들은 작은 방처럼 꾸민 2층 객석으로 이동했다. 노란 조명과 카펫으로 ‘작은 방’처럼 느껴진 서브 스테이지에서 밴드는 ‘청춘연가’와 ‘헤어지기로 해’, ‘기억을 걷는 시간’ 등의 곡을 들려줬고, 중간 중간 관객들과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크리스마스 인 넬스룸’인데 그동안 캐롤이나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무대를 안보여드린 것 같아요. 뭐를 할까 하다가 우리도 재미있고, 보는 분들도 조금 재미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시야를 바꿔보자 생각했어요.”(넬 보컬 김종완)
 
베이스 이정훈이 조명탄을 켜고 시작한 ‘Starshell’, 백색 미러볼 빛이 명멸하던 ‘Movie’ 등 시각적 예술이 결합된 무대도 곡들을 색다르게 느끼게 했다. 특히 슈게이징 형식으로 편곡된 ‘Movie’에선 잔잔한 연주 뒤 휘몰아치며 우는 듯한 이재경의 기타 소리가 관객들의 넋을 잃게 했다. 
 
엔딩곡은 2001년 첫 앨범 ‘Reflection of’의 두번째 수록곡 ‘믿어선 안될 말’. 밴드는 19년 간 함께해온 이 곡을 세월에 녹여 연주했고, 객석은 야수처럼 포효하기 시작했다. 대화면이 아니쉬 카푸의 조형 미술처럼 빨간 단색으로 처리될 때, 멤버 넷이 뿜어내는 찬란한 음악적 사유의 분비물이 공연장에 촘촘히 빛났다.
 
지난 24일 서울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인 넬스룸(CHRISTMAS IN NELL'S ROOM)’ 대형 화면에 비춰진 멤버들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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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익도

자유롭게 방랑하는 공간. 문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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