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연기’란 사실 정답이 없다. 그래서 맞고 틀리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를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질문이자 정의 같다. 부담감도 크다. 누군가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천편일률적 긍정의 대답보다 부정의 의미를 대중들은 듣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하다. 그래서 배우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아니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잘못된 질문이 된다.
데뷔 62년 차, 올해로 여든 네 살의 한 노배우가 최근 인터뷰에서 거침없는 발언으로 후배들을 평가했다. 아들뻘 혹은 손자 손녀뻘 되는 후배 배우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옳음과 그름을 전했다. 현역 최연장자 배우 이순재의 눈은 그래서 세월을 읽었다. ‘이순재 리스트’라고 이름을 붙여봤다.
이순재. 사진/영화사 두둥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는 반백년이 넘는 시간을 배우로 살아왔음에도 굳건했다. 어떤 의미에선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1960년대 본인이 한 참 영화계에서 활동할 당시였단다.
“쉬는 날 혹은 촬영이 없는 날도 난 현장에 갔어요. 사실 그때는 딱히 갈 곳도 없고(웃음). 워낙 유명하고 엄청난 대선배들이 연기를 하는데 눈으로 봐야죠. ‘도대체 저 양반은 뭘 어떻게 하는 데 그렇게 대단하단거야’란 심보로 감시하러 갔죠. 그런데 알겠더라구요. 카메라 뒤에서 보니. 조금씩 조금씩 나와 그 선배들의 차이를 알아갔죠.”
팔순이 넘는 지금도 이순재는 현장에서 특별대우를 요구하지 않는단다. 유명한 일화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다. 워낙 열악한 현장이기에 밤샘 촬영, 새벽 촬영이 부지기수다. 감독과 스태프 후배들이 배려하먼저 촬영 후 퇴근(?)을 권유했다. 그는 ‘스케줄에 맞춰라’ ‘내가 특별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며 똑같이 현장을 지켰단다. 최근 뉴스토마토와 인터뷰를 한 배우 이승기가 본 이순재의 모습이다.
이순재는 과거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현장을 떠올렸다. 배우 김명민의 착실함과 노력 그리고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극찬했다. ‘빈틈이 없다’, ‘언제나 약속 시간보다 먼저 오더라’, ‘배우는 로딩 시간을 가져야 한다. 현장의 공기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그걸 알더라’ 등 자신이 본 후배 김명민을 극찬했다. 반대로 스타의식에 젖어 혼쭐을 냈던 후배도 거론했다. ‘선배들이 모두 모여 대기하고 있는데도 꼭 한 녀석이 말썽이었다. 한 번은 촬영 준비가 끝이 났는데도 차안에서 뭘 하는지 나오지를 않았다. 스태프를 시켜서 대려오게 한 뒤 혼을 낸 적이 있다’고 전했다. 이후 그 후배는 자세를 고쳤다. 지금은 꼬박꼬박 연락을 하면서 인사를 하고 안부를 먼저 묻는 착한 후배란다. 연기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며 칭찬을 했다. 배우 장근석이다.
최근 영화 ‘덕구’로 오랜만에 스크린 단독 주연을 맡은 이순재다. 놀랍게도 그는 이번 작품에 노개런티로 출연했다. 그 흔한 러닝 계약도 없다. 그냥 노개런티다. 이 노배우는 ‘작품이 좋다. 그러면 되는 것 아닌가? 뭐 많이 줄 것 같지도 않고’ 라며 너털웃음이다. 결국 배우는 무대에 오를 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대의 소중함을 말한다. 초심을 말한다. 신인 시절 ‘대사 한 마디만 해봤으면’이란 소망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단다. 그 초심을 생각하면 지금 이 나이에도 연기를 할 수 있단 게 너무 고맙고 감사하다고.
“세월이 많이 변했죠, 뭐랄까. 우리가 활동하던 그 시절과 지금은 정말 많은 것이 변했어요. 시대의 변화 속에 후배들도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고. 배용준 같은 경우 ‘겨울연가’ 외에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 ‘태왕사신기’는 내가 봐도 어울리는 작품이 아니었고. 송중기? ‘태양의 후예’ 이전과 이후 기억나는 존재감이 있었나? 반짝 스타와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에 취해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먹는 모습이 안타까워요.”
이순재. 사진/영화사 두둥
일부 후배들의 실명 거론도 거침없었다. 하지만 잘못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애정'이었다. 출중한 배우적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고 묵히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이병헌, 최민식, 송강호 등 이순재가 거론한 ‘알멩이가 있는 배우’들의 모습 속에서 그 안타까움의 이유도 담겨 있었다. 끊임없이 대중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색깔을 덧칠하는 모습을 보여 준 이들 3인방의 발걸음이 눈에 띈단다. 반대로 인기를 얻고 스스로를 가둬버린 채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후배들의 모습에는 단 번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글쎄요. 그들의 그런 선택이 전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내 선배들만 봐도 사실 나도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어요. 말년이 경제적으로 다들 많이 힘들었거든요. 돌아가신 선배들의 어려움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면서 배우가 지녀야 할 가치도 많이 변하는 것 같아요.”
아쉽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가치의 척도를 너무도 단순하지만 명확한 연기에 방점을 찍었다. 앞으로 몇 년 더 활동을 할지 모르지만 이 노배우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활동의 즐거움을 느끼며 달릴 계획이란다.
“술 담배도 다 끊은 지 30년이 넘었으니. 그래서 아직은 버티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태어나서 병원 입원 한 번 한 적도 없으니. 그저 즐거워요. 얼마나 좋아. 이 나이에도 연기를 계속 할 수 있으니.”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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