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마을 르포#.2]구룡마을 사람들
오늘 부는 바람은
2015-02-23 09:06:00 2015-02-23 10:53:27
조세희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이 나라의 재개발에 바치는 초상(肖像)이다. 살던 곳에서 밀려난 갈 데 없는 사람들, 그들이 난 자리에 아파트며 건물을 짓고 배를 불리려는 사람들, 그 초상만은 시간이 흘러도 낡지 않는다. 그림이란 게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흐려지게 마련인데, ‘난쏘공’만은 그렇지가 않다. 어찌나 관리가 잘 되는지, 오히려 선명해진다. 아직도 ‘재개발’이라는 단어에 가슴 뛰는 이들이 많은 이 나라에서, 그 단어에 뒤이어 ‘난쏘공’이라는 초상을 떠올리는 이 또한 많은 것,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구룡마을’이라는 이름은, 그리고 그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성 매체가 전하는 구룡마을의 이야기들은 대개 비슷한 모습이다. 주민 자치회관에 대한 강남구의 과도한 행정집행, 개발을 둘러싼 서울시와 강남구의 힘겨루기, 그로 인한 피해자들, 그들의 눈물 섞인 인터뷰. 이에 더해, ‘무허가 빈민촌’이라는 마을에 대한 소개는, 자연스레 우리의 머릿속에 구룡마을을 ‘난쏘공’ 속 어디쯤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고는 끝이다. 그 많은 언론들의 제목만 다른, 같은 내용의 보도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을, ‘난쏘공’안에 가두고 만다. 언론과 독자가 손잡고 만들어 낸, 일종의 착시(錯視)다.
 
◇구룡마을 철거 관련 언론보도(자료=네이버 뉴스 캡쳐)
 
감춰 있던 이야기, 혹은 새로운 이야기가 들릴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언급했다시피 ‘구룡마을’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 기사와 사진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틀 안에 담겨 있다. 그 틀 안에서 독자들은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라는 궁금증 보다는, ‘다를 거 없는 이야기네’ 라는, 일종의 피로감을 먼저 느낀다. 조금 더 나아가, ‘보고 듣는 것만이 전부일까? 가려진 이야기가 더 있지는 않을까?’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곧 직접 가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80년대, 서울 곳곳에서 일어난 개발 붐은 거주민들의 손에 얼마간의 보상금을 쥐어주고 원래 살던 곳을 떠나도록 했다. 그러다 대모산과 구룡산 자락에 정착한 몇몇은, 농업용 비닐하우스를 주거용으로 개조해 마을을 형성했다. 마을에 들어선 비닐하우스 주택들은 주거 목적으로만 이용되지 않았다. 집주인들은 집의 규모를 키우거나, 방을 쪼개거나, 혹은 아예 새로운 집을 더 지은 뒤, 주택을 부동산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개발에 밀려나 그곳에 집을 짓고 산 주민들 말고도, 사업에 실패해 그 마을에 ‘집을 사서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는 게 그 근거다.
 
 
"이 마을에는 어떻게 들어오시게 된 거예요?"
 
 
"89년인가 사업이 망해서, 여기 들어와서 2년 만 좀 재충전을 하고 나가자, 해서 집을 사서 들어오게 된 거죠."
 
 
前마을자치회장 김병섭 씨 인터뷰 中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부터 그 마을에는, 돈이 돌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구룡마을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태생적으로 안전하지 못했던 주거 환경으로 인해 마을의 전반에 걸친 재개발 논의가 시작되었다. 토지주, 마을에서 부동산 깨나 굴렸던 집주인, 제 집 하나 간신히 갖고 있는 주민, 그리고 세입자들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민영이냐 공영이냐를 시작으로, 혼용방식이냐 수용방식이냐 등, 저마다의 바람에 따라 목소리를 냈다. 주거 환경을 생각하면 합의와 개발의 과정은 신속해야 했지만, 단지 거주의 문제는 아니었다. 부동산의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꽤 오랜 기간 동안, 여러 목소리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구룡마을 개발 관련 과거 언론보도(자료=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쳐)
 
마을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이 부분에서 마을 내 무리의 주장은 명확하게 갈렸다. 토지주를 중심으로 한 이들은 ‘민영개발’을 주장했다. 땅에 대한 보상으로 얻게 될 아파트 입주권이 이들의 가장 큰 목표였을 것이다. 땅을 갖지 못한 이들은 ‘공영개발’을 주장했다. 민영 개발이 시작되면, 공식적으로는 남의 땅에서 허가 없이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던 이들은 보상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게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버텨 내야 했다. 그렇게 마을이 여러 조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잃지 않기 위한, 서로에 대한 반대의 연속이었다.
 
그러는 동안 마을을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에 막연한 희망을 가지는 이가 있었고, 그 막연한 희망을 팔아 장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희망을 갖기조차 힘에 부치는 이들도 물론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떠 낼 것 같았던 개발의 첫 삽이 기약 없이 흐려져 감에 따라, 손에 쥔 것 없는 이들부터 지쳐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목소리가 관철될 때까지 버텨 낼 여력이 있던 몇 명의 추동에 마을 사람들은 두 파(派), 세 파로 갈렸다. 파가 다른 주민끼리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는 사이로 변해 갔으며, 언젠가부터 마을에서 소리 없이 사라진 이들도 있었다. 마을은 그렇게 조용해져 갔다.
 
조용해진 마을의 두 중심에는, ‘구룡마을 주민자치회’(이하 주민자치회)와 ‘구룡마을 자치회’(이하 마을자치회)라는, 두 집단이 있다. 크게 민영개발과 공영개발로 맞섰던 이 두 집단은 2011년, 마을 재개발이 ‘공영개발’ 방식으로 가닥이 잡히자, 각각 ‘혼용방식’(수용방식+환지방식) 과 ‘수용방식’을 내세우며 대립했다.
 
◇구룡마을 수용방식·혼합방식 설명도(자료=바람아시아)
 
민영개발을 더 이상 주장하기는 힘들게 된 주민 자치회 측이, 개발이 끝난 뒤에 땅 주인에게 일정 비율의 땅을 돌려주는 환지방식이 포함된 혼용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주민자치회에 토지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반면 LH(한국토지주택공사) 혹은 SH공사가 주체가 되어 개발 예정 지역의 토지를 모두 매입한 뒤, 분양을 실시하는 수용방식의 경우, 개발 구역 획정 등의 문제가 없으므로 개발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따라서 거주민들이 이전까지 살던 곳에 다시 들어가 살 수 있는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거주민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마을자치회가 수용방식을 환영하는 모습 또한 납득이 간다.
 
단순히 토지주와 거주민의 의견차이로 인한 갈등이었다면, 주민자치회관이 철거되던 날 눈물을 흘리면서 힘 없는 ‘거주민’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할머니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자치회의 기자 회견이 있던 날, 마을자치회 회장에게 ‘바깥에 집도 있는 놈이 사기치지 말라며’ 욕하던 아주머니 또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주민자치회와 마을자치회가 대립하고 있는 이 상황의 좀 더 안쪽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지 조금 더 궁금해졌다.
 
◇구룡마을 야경(사진=바람아시아)
 
조휴연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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