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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망각의 목소리를 재판하다
소리와 물성으로 망각의 폭력성 표현한 연극 <죽음과 소녀>
2012-11-13 09:56:40 2012-11-13 09:58:32
[뉴스토마토 김나볏기자] '용서하고 잊자. 덮어버리자. 끝내자.' 상처를 덮으라고 종용하는 망각의 목소리는 얼마나 달콤한가.
 
기억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차라리 아예 기억을 잘라내어 버리고 싶은 순간이 온다. 망각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얇은 귓속을 파고든다.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잊지 않으면 결국 당신만 다친다'는 논리에 심장은 쿵쾅거린다. 망각의 유혹, 망각의 협박을 이겨낸 후에야 기억은 비로소 저항이 된다.
 
연극 <죽음과 소녀>는 피노체트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제목이 슈베르트의 음악과 같다. 슈베르트의 음악에서 죽음이 자신을 거부하는 소녀에게 '해치지 않는다, 내 품에서 편히 잠들거라'라고 끈덕지게 유혹하는 것처럼, 연극 <죽음과 소녀>에서 망각은 주인공 중 한 명인 빠울리나에게 15년이나 지났으니 이제 그만 독재정권의 납치와 성고문을 잊자고 종용한다.
 
이 연극은 세 명의 인물이 미묘하게 대립각을 세우면서 진행된다. 남편이 집으로 데려온 의사 로베르또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을 고문한 의사임을 직감하는 빠울리나, 목소리만으로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며 인권위원회의 대표로서 아내와 대치하는 남편 헤라르도,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의사 로베르또의 설전이 마치 한편의 스릴러물처럼 전개된다.
 
공연을 만든 양손프로젝트는 이미 여러차례 한국 무대에 오른 이 연극을 미니멀하게 압축해냈다.
 
원작의 8개 장면 중 갈등이 시작되는 대목부터 3개 장면만이 무대에 오른다. 사실적 재현을 피한 무대에는 테이블과 의자, 스탠딩 마이크만이 놓여 있다. 극의 길이가 짧아졌지만 대신 소품의 소리와 물성을 강조한 덕분에 감정의 밀도는 되려 높아졌다. 
 
 
 
 
 
 
 
 
 
 
 
 
 
 
 
 
 
 
 
 
 
 
극 초반, 마이크를 주로 사용하는 주체는 '운전자'라는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는 의사 로베르또다.
 
자신을 변호하는 로베르또의 목소리는 순간순간 마이크를 통해 굵게 번져 나가면서 빠울리나와 헤라르도를 조종한다. 빠울리나와 헤라르도도 마이크를 이따금 잡지만 주도권은 로베르또 쪽에 있다. 말하자면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망각을 종용하는 목소리 혹은 망각의 유혹에 굴복하는 목소리다.
 
철제다리의 직사각형 테이블을 활용하는 방식도 흥미롭다. 극 초반에는 테이블 5개가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고, 관객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마주한 채 무대를 응시하게 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배우들은 테이블의 배치를 이리저리 바꿔 공간의 구획을 설정하기도 하고, 인물간 감정의 거리를 표현하기도 한다. 가령, 빠울리나가 기억을 복기하는 동안 다른 배우는 테이블을 활용해 큰 소리를 내며 기억에서 비롯되는 고통의 크기를 표현한다.
 
의자의 활용도 눈길이 가는 대목이다. 처음에는 의자에 아무도 앉지 않은 채로 심문이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배우들이 의자에 앉는 횟수가 잦아지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가 자연스레 명확해진다.
 
연극 <죽음과 소녀>에서는 배우의 몸에서 출발하는 소리, 물성을 통해 인물의 고통과 인물간 관계가 구축된다.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연기의 재료로 삼는 양손프로젝트의 특징은 이번 공연에서도 두드러진다.
 
극의 마지막, 빠울리나의 총구는 사람이 아닌 마이크, 즉 망각의 목소리를 향한다. 이 극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하는 장면인 동시에 배우를 중심에 두는 이 극단의 특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해 깊은 인상을 남긴다.
 
작 아리엘 도르프만, 제작 양손프로젝트, 연출 박지혜, 출연 양조아, 손상규, 양종욱,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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