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집으로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동정심을 갖고 잘해주자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공유정옥 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산재 피해자를 대하는 방식이 ‘선의의 해석(benefit of the doubt)’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상충하는 두 증거가 제시됐을 때, 두 증거의 무게에 경중을 가릴 수 없다면 보상을 청구한 사람에게 유리한 쪽을 채택하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는 “조사가 불충분하거나 자료가 제출되지 않아서 입증이 어려운 상황에 대해,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은 산재보상 문제 해결법이 아니다”며 “원인을 정확히 짚어내기 어렵더라도 업무로 인해 발병 또는 악화됐을 개연성이 인정된다면 산재 보상을 하는 것이 온당하고, 원인 조사가 미흡하다는 핑계로 판정을 미루면 산재보상보험제도의 취지 자체에 어긋나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산재 인정의 가장 큰 벽은 피재자의 입증 책임입니다. 노동자가 자신이 어떤 화학물질에 얼마나 노출됐는지 직접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청 노동자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조차 ‘부분 정보’로만 이해한 채 작업을 수행한다는 점입니다.
산재 선보장 제도 재논의 시급
전문가들은 정보가 원청에 집중된 구조에서 노동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불공정하다며, 기업이 안전 조치를 다했음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법리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는 “(노란봉투법 시행 등을 통해) 업무상질병 판정 절차와 범위가 과거보다 개선된 점이 있기는 해도 여전히 노동자 측에게는 조사 참여 권한이나 자료 접근 권한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 형국”이라고 했습니다.
임 변호사는 “산안법 개정에 대한 제안과 발의가 있었지만 진전이 없는 상태로, 여전히 사측에서 ‘영업비밀’이나 ‘국가핵심기술 관련 정보’라는 이유로 은폐하는 자료는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며 “산안법 내 별도로 노동자가 사업주를 대상으로 하는 정보공개 청구 절차를 만들 필요가 있고, 아울러 산업기술보호법에 ‘국가핵심기술’ 제도를 작업 환경 문제 은폐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는 독소 조항이 존재하고 있어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는 “산업안전보건법에 ‘근로자에게 안전보건 정보를 제공해야 할 사업주의 의무’가 규정돼 있으나, 처벌 규정 등이 없어 명목상의 규정에 불과하다”며 “삼성전자 등 기업에서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나 물질안전보건자료 비치와 같은 산업안전보건법상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협력업체 직원들까지 해당 자료에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하청 노동자는 짧은 근속기간과 잦은 업체 변경으로 인해 잠복기가 긴 질병을 증명하기가 어렵고, 원청으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최종연 변호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도 “첨단 전자산업의 산업재해 인정이 어려움은 유해 요인에 관한 정보가 영업비밀로 보호되고, 근로자가 작업 과정이나 산재 신청 과정에서 적절히 정보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공단과 법원, 진료기록 감정을 담당하는 의사들도 유해 요인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최 변호사는 “평소 근로자들에게 작업 환경과 유해 요인 정보를 제공하고 산재 신청 시 공단 역학조사를 충실히 하고 재해자를 참여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며 “법원에서 대법원 선례에 충실하도록 첨단산업이나 영업비밀인 유해물질에 관해 연구가 부족할 수 있는 의사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간접사실들에 기반해 상당인과관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 시 특정 감정의가 아닌 폭넓은 전문가 자문을 받을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업무상 질병 판정 위원회의 전향적 태도 변화와 함께, 산재 승인까지 2~6년이 걸리는 현실을 개선할 ‘산재 선보장 제도’ 논의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아픈 노동자가 치료비 걱정 없이 투병할 수 있도록 국가와 기업이 먼저 보장하고, 사후에 인과관계를 따지자는 것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2월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내 첨단 복합 반도체 연구개발(R&D) 센터인 NRD-K 클린룸 시설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공유정옥 전문의는 “사회안전망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산재 선보상 제도 등을 진지하게 고민해서 진행할 필요가 있고 제도의 일관성과 판정이 운에 맡겨지지 않도록 전문성을 갖고 판정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며 “하청·이주·단기 노동자가 많은 산업일수록, 업무상 질병 판정위원회가 전향적 태도가 요구된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업주가 협조를 잘하고 산재보험 운영 기관인 근로복지공단 등에서 운영을 잘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하청업체거나 소규모 사업장, 노동조합이 없거나 언어 장벽과 같은 걸림돌이 있는 노동자일수록 더 산재 인정을 받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짧은 근속기간과 잦은 업체 변경에 내몰리는 하청 노동자에게 잠복기가 긴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입증 자체가 어려운 문제가 있고, 원청 공장에서 일하는 하청 노동자의 경우 현장 조사 등에 대한 부담이 크다는 점에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더 힘들게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책임도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실제 해외에서는 이미 기업과 국가의 책무를 엄중히 묻고 있습니다. 대만의 ‘RCA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지난 1969년 대만에 TV부품 공장을 세운 미국 가전업체 RCA의 대만 공장 노동자들이 암에 걸리자, 1987년 노동자들은 ‘RCA 자구회’를 결성해 끈질기게 투쟁하며 정부와 기업을 압박했습니다. 지난 2002년 소송이 시작된 이후 오랜 다툼 끝에 지난 2018년 대만 법원은 기업이 유해성을 인지하고도 보호 조치를 게을리 했다면 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해외 경쟁사들은 이미 노동 안전과 공급망 관리를 경영의 핵심 가치로 두고 있습니다. 대만 TSMC의 경우 RBA(Responsible Business Alliance) 기준에 맞춘 공급망 인권·환경 실사를 진행하며, 협력사 노동조건·안전·환경을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선제적 노력도 참고할 만합니다. 독일의 법정재해보험(DGUV)은 단순 보상을 넘어 치료, 재활, 나아가 ‘예방과 감독’ 업무까지 직접 수행합니다. 보험 기관이 현장을 감독하고 예방 수칙을 강제하는 구조입니다. 미국 노동부 안전보건청(OSHA)은 하청 노동자의 사고를 원청의 기록으로 합산해 관리합니다. 하청의 사고가 곧 원청의 평가로 이어지기에 원청이 하청의 안전을 방치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이 마련된 셈입니다.
이와 함께 EU의 경우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을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게 전체 가치사슬에서 발생하는 인권·환경 침해를 파악·예방·시정할 법적 의무를 부과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하기도 합니다.
이에 비해 반도체 강국인 한국은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따르면,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군 발암물질(Group 1)에 노출된 반도체 제조업 종사자(2020년 통계청 인구주택조사 결과 기준) 100명 중 5명은 황산(5.3%)에, 3명은 비소(3%)에, 2~3명은 방사선(2.63%), 니켈(1.31%) 등에 노출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더 세분화되는 질병과 재해에 대해선 연구가 부족하고 기업의 입증 책임도 약한 편입니다.
지난 3월31일 최원호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오른쪽)이 방사선 피폭 사건이 발생한 경기 용인시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을 방문해 방사선안전관리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원안위)
지난 2019년도에 나온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 역학조사 결과'를 보면 백혈병의 경우 발생 위험이 일반 국민 대비 1.19배, 사망 위험은 전체 근로자 대비 2.3배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당시 안전보건공단은 10년간의 추적 조사에서도 혈액암 발생에 기여한 특정한 원인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작업 환경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기업의 입증 책임을 강제하는 방안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이종란 노무사는 “입증의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사회 통념상 합리적인 수준으로 업무와 질병 간의 상당 인과관계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노동부의 산재 간소화 방침은 추정의 원칙 적용을 통해 역학조사가 생략되기는 하지만 그 범위가 굉장히 협소하고 제한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기업의 산재 책임 자료 제출 의무를 강제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꼽힙니다. 반도체 공정의 세부 노출 데이터가 여전히 ‘영업비밀’로 분류되면서, 근로복지공단이 제출 요구를 하더라도 기업이 정보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고 버티면 달리 방법이 없는 실정입니다.
이 노무사는 “기업에서는 여전히 비밀유지를 내세워 정보를 주지 않은 상황”이라며 “(역학조사 생략 관련) 지침이 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동안 반도체 공정 과정에서의 변화도 많고 취급하는 화학물질도 더 다양해지는 등 반도체 산업 환경 역시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처리 기간 단축에만 신경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근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반도체 공정이 2011년 이후 완전히 안전해진 것도 아닌 데다, 여전히 유해 요인 노출에 따른 직업병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오염과 생식독성 문제도
반도체 산업의 장밋빛 전망 뒤에 숨겨진 환경오염과 생식독성 문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백도명 서울대 명예교수(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는 “웨이퍼 수율을 높이려면 화학 처리가 섬세하게 이뤄져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지·보수 과정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산재로 이어질 수 있다”며 “실제 실리콘밸리에서는 해당 업무를 수행했던 여성 오퍼레이터들의 유산이나 질병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 반도체 노동자들의 불임과 기형아 출산 등 생식독성 문제는 10여년 전 이슈가 되었지만, 구체적인 대안 마련으로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청정 첨단산업’으로 홍보돼 왔지만 사실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공해산업입니다. 포토·식각·세정·도금·증착 등 거의 모든 공정에서 다양한 유기용제와 가스, 레이저, 방사선이 사용되고, 이를 걸러내는 장치가 존재하지만 오염과 위해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백 교수는 “화학약품이나 방사선을 이용해 회로를 깎아내는 공정 특성상 일반 대기오염 모니터링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정밀한 환경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거대 산단 조성 시 환경영향평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엄격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환경 문제도 따져봐야 합니다.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된 유해가스를 배출할 때 이를 걸러내는 장치가 설치돼 있지만 100% 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도 마찬가지예요. 반도체 공장은 물을 엄청나게 사용하는데 이 물을 재활용한다고 하지만 역시 100%는 아니죠. 수질오염 측정이 잘 되지 않거나 기존 대기오염 모니터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화학물질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도체 호황은 노동자의 눈물과 환경의 부담 위에 세운 상처 어린 성취라는 백 교수의 지적이 뼈아픈 오늘입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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