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기자] 국회에서 '스테이블코인법'으로 불리는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금융지주사들은 물밑에서 시장 선점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법제화가 이뤄진 후에 대응하다가는 글로벌 플랫폼과 빅테크, 해외 스테이블코인 사업자들과 경쟁에 밀릴 수 있는 만큼 결제·송금·정산 인프라 주도권 경쟁에 먼저 뛰어드는 모습입니다.
은행-가상자산 결합 본격화
18일 정치권 및 금융권에 따르면 가상자산의 제도권 진입을 위한 기본법인 디지털자산기본법(가상자산 2단계법)의 상반기 처리가 사실상 불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둔 만큼 일정을 고려하면 연내 국회 본회의 통과도 불투명하다는 의견이 우세합니다. 당정은 당초 법안 처리 시점을 지난해 말로 잡았다가 올해 1분기 내로 목표 시기를 바꿨으나 이마저도 불발됐습니다.
법안이 표류하는 사이 시장에선 이미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주요 금융지주와 은행들은 최근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실증 사업과 기술 검증을 잇달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장 발행이 가능한 단계는 아니지만 향후 제도권 편입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결제와 해외 송금, 정산 등 핵심 기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됩니다.
하나금융지주(086790)는 최근 하나은행을 통해 두나무의 지분 6.55%를 약 1조33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나은행은 송치형 두나무 회장(지분율 25.5%), 김형년 두나무 부회장(13.1%), 우리기술투자(7.2%)에 이어 4대 주주가 됩니다. 취득 목적은 '전략적 지분 투자를 통한 신금융 경쟁력 확보'로 명시했습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하나금융그룹과 두나무의 협력을 가시화할 수 있는 대표적 분야로 거론됩니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지배구조에 대해 은행 과반 지분을 의무화할지 여부입니다. 두나무는 국내 거래소 5사 가운데 유일하게 이해관계를 함께할 주주로 시중은행을 포섭, 과반 지분 의무화가 실제 단행되더라도 규제 불이익을 덜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KB금융지주는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정산·입금에 이르는 전 단계를 통합한 기술 검증(PoC)을 마친 상태입니다. 전자결제 전문 기업 KG이니시스, 글로벌 레이어1 블록체인 플랫폼 카이아, 디지털자산 설루션 기업 오픈에셋(OpenAsset) 등이 파트너사인데요.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부터 오프라인 결제, 가맹점 정산, 해외 송금까지 금융서비스 전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 통합 실증 사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베트남 현지 계좌 송금 과정까지 검증하면서 단순 국내 결제에 그치지 않고 해외 송금 시장 가능성도 점검했습니다. 기존 국제 송금 시스템 대비 수수료와 처리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실제 상용화까지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상당 부분 구현 가능한 단계까지 왔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하나금융지주는 지난 15일 주요 관계사인 하나은행을 통해 국내 최대 가상자산 인프라를 보유한 두나무에 대한 1조원 규모 지분을 취득하고, 금융과 디지털자산을 연계한 미래혁신모델 구축을 위한 전략적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하나금융지주 명동사옥에서 개최된 협약식에 참석한 함영주 하나금융 회장(오른쪽)이 김형년 두나무 부회장(사왼쪽)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하나금융지주)
"법제화 전 시장재편 대비"
다른 금융지주도 디지털자산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신한금융지주(
신한지주(055550))는 지주 차원에서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권 21건을 출원하며 신한은행, 신한카드 등 계열사를 묶어 디지털자산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신한은행의 경우 스테이블코인 기반 국제 결제 사업 검증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요. 일본 금융기관들과 함께 블록체인 기반 국제 결제 프로젝트인 '프로젝트 팍스(Project Pax)'를 통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교환 테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국가 간 송금 과정에서 중개은행 단계를 줄이고 실시간에 가까운 정산을 구현하는 것이 핵심인데요. 기존 국제 송금 체계인 스위프트(SWIFT) 망보다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융권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원화와 엔화 기반 디지털자산 교환 구조를 실험한다는 점에서 향후 아시아 지역 결제 인프라 경쟁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늦어질수록 오히려 시장 주도권 경쟁은 더 치열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법안 통과 이후 사업을 준비할 경우 글로벌 플랫폼과 빅테크, 해외 스테이블코인 사업자들에 밀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한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과거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이나 간편결제 시장 초기처럼 제도화 이후 대응에 나섰다가 주도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며 “당장은 법적 불확실성이 크지만 금융사들은 결국 스테이블코인을 미래 결제 인프라 경쟁으로 보고 선제 대응에 나서는 분위기"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디지털자산기본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은 가상자산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 규제 등을 두고 견해가 첨예하게 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융위원회는 법안에 대주주 지분을 제한하는 규제를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가상자산거래소가 제도권에 들어오면 공공 인프라 성격을 띠게 되므로 그 위상에 걸맞게 지배구조를 개선해 대주주 지분을 15~20%로 제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주주 지분이 20%를 초과하면 나머지 지분은 강제 매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야당과 여당 내부에서도 정부 방안에 반대하며 충돌했습니다. 이후 정부·여당은 가상자산거래소 대주주 지분율을 20%로 제한하고 예외적으로 34%까지 허용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위헌 논란이 불붙었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를 내고 법안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입조처는 보고서에서 "지분 보유 자체를 제한하는 방식은 재산권(헌법 제23조)과 기업 활동의 자유(제15조)를 제한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울 강남구 빗썸라운지 전광판에 비트코인 가격이 표시돼 있다. (사진=뉴시스)
이종용 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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