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부호들)③"검색이 세상을 바꾼다" 믿음을 현실로, '리옌훙'
2014-01-20 10:00:00 2014-01-20 10:00:00
◇2011년 바이두 기술혁신 컨퍼런스에서 연설 중인 리옌훙 회장(사진=로이터통신)
 
[뉴스토마토 김진양기자] '포스트잇', '버버리', '워크맨', '호치키스', '대일밴드'
 
특정 제품의 상표명이 보편적인 일반 명사로 쓰이는 경우입니다. 제품군을 통칭하는 고유명사는 때론 해당 행동을 가르키는 동사로 쓰이기도 하는데요, '구글링(googling)'이 대표적이지요.
 
중국에서는 '바이두(百度)'라는 말이 인터넷 검색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그를 수백, 수천 번 찾아보다 무심결에 뒤를 돌아봤는데 희미한 불빛 아래 그가 있었다(衆里尋他千百度,驀然回首,那人却在燈火欄珊處)'라는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바이두는 '찾기'에는 안성맞춤인 단어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바이두는 중국 인터넷 검색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엄청난 영향력을 자랑합니다.
 
바이두는 앞서 소개한 텐센트, 알리바바와 함께 'TAB'이라 불리며 중국 인터넷 업계를 이끄는 기업으로 꼽히는데요, 31살의 젊은 나이에 바이두를 창립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리옌훙(李彦宏, 영문명 Robin Li) 회장도 각광받는 신흥 부호입니다.
 
포브스에 따르면 리옌훙의 자산은 작년 10월 기준 111억달러입니다. 중국 내에서 3대 부호에 꼽히는 수준입니다. 최근 블룸버그 백만장자지수는 리옌훙의 자산이 주가 상승을 발판으로 122억달러에 도달했다며 쭝칭훙 와하하 회장, 왕젠린 다렌 완다 회장을 제치고 최고 부자에 등극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리옌훙의 성공 과정에서 소위 '드라마틱'하다고 꼽을 만한 사건은 딱히 없습니다. 적절한 시기에 인생의 전환점을 겪으며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자신이 믿고있는 것을 현실로 옮기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을 뿐입니다.
 
특히 그는 "바이두를 창업할 때에만해도 검색 시장이 이렇게 많은 돈을 가져다 줄 지는 몰랐다"고 회고합니다. 검색이 인터넷 시대에 가장 중요한 서비스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미쳐 상상하지 못했다는 설명입니다.
 
검색을 선택한 것도 "단지 내가 검색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겸손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리옌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단순히 그가 운이 좋아서 였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의 성공을 엿보기 위해서는 8년간의 미국 생활로 거슬러 올라가야합니다.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학교의 정보관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겠다는 목표로 미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러나 뉴욕 주립대 버팔로 캠퍼스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를 마친 그는 돌연 학업을 중단합니다. "남들이 10년 넘게 연구해온 것을 나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란 의문에 보다 실용적인 일을 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월스트리트의 러브콜을 받고 다우존스에 입사해 오늘날까지도 월가의 수많은 기업들이 사용하고 있는 금융정보 검색시스템을 개발합니다. 3년간의 월가 생활을 마치고는 벤처의 요람이라 불리는 실리콘밸리로 이동을 하지요. 이 곳에서 '과학기술이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는 깨달음을 얻게되는데요, 유명 검색엔진 회사였던 인포시크(Infoseek)에서 검색의 매력에 빠지며 이 곳에 일생을 걸기로 다짐했습니다.
 
미국 생활은 리옌훙에게 기업가로서의 자질도 심어줬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 제로에서 시작해 모든 것을 던지는 투지, 회사 가치 극대화를 위한 노력 등은 바이두 경영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특히 그는 우수한 기술만이 회사의 성공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득했습니다. 기술을 발판으로 한 상업적 전략이 성공의 결정적 요인임을 깨달은 겁니다.
 
기업 전략의 중요성은 주식 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리옌훙은 기업들의 실적이나 향후 전략 등을 면밀히 살펴 투자에 나섰고 이 같은 가치 평가를 기반으로 그는 훗날 창업 자금이 된 120만달러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리옌훙은 1999년 마침내 창업의 꿈을 안고 중국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중국의 인터넷 시장은 그의 믿음을 실현시키기 가장 적합한 공간이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을 담은 '실리콘밸리 비즈니스 전쟁'이라는 책에서 그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비즈니스 전쟁을 수 차례 목도했다. 내가 참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주저도 했지만 정보 경제의 발전 속도는 오히려 참여하지 않는 것이 더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토로했습니다.
 
바이두 창업 이후에는 온화하지만 거침없는 결단을 내리는 승부사적인 기질이 그를 성공으로 인도했습니다.
 
당초 바이두는 포털 사이트에 검색 엔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그러나 창업을 한 지 2년이 지난 2001년 리옌훙은 "독자적인 검색엔진 사이트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이사회의 강한 반발에 직면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독자적인 길을 모색할 경우 당장의 수익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찬바람이 불던 인터넷 시장의 분위기도 이사회의 냉랭한 분위기에 한 몫 했습니다.
 
바이두의 발전을 위해서는 독자 행보가 꼭 필요했다고 판단한 리옌훙은 이사들을 어떻게든 설득하려 해봤지만 끝내는 그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붙잡고 있던 전화기를 내던지며 "그럼 나도 안해!"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의 승부수가 통한 것일까요. 이사회는 리옌훙의 계획대로 독자적인 검색엔진으로 전환을 선택했습니다. "이사회의 마음을 바꾼 것은 리옌훙의 설득이 아닌 자신감있는 태도였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후 바이두는 하루 평균 4억명 이상이 찾는 세계 최대의 중국어 사이트로 급성장 했습니다. 2005년에는 중국 기업 최초로 나스닥 시장에 상장했고 현재는 모바일 시장의 성장에 발맞춰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기술이 세계를 바꾼다'는 창업 초기의 믿음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요, 리옌훙은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바이두를 만든 것은 '기술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겠다'는 기술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수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개발한 기술의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에 무언가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기쁘다"며 "사회에 공헌을 하다보면 언젠가 나에게도 그 보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고 말합니다.
 
기술로 세계를 윤택하게 한다는 리옌훙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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