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경기 포천 승진과학화훈련장에서 진행된 '2026년 합동화력훈련'에서 K2 전차가 사격하고 있다. 국방부는 자주국방, 첨단강군, 방산강국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시작전통제권 회복을 앞둔 한국군의 확고한 군사 대비태세를 보여주기 위해 이번 훈련을 주한미군 없이 단독으로 준비했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 사회에는 아직도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면 큰일 난다'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보수 진영 일부 원로층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뿌리 깊다. 이는 단순한 사대주의라기보다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고, 전후 경제발전 과정에서도 미국의 안보 우산과 시장 개방의 혜택을 받았다. 따라서 미국과 충돌할 경우 무역 보복이나 주한미군 감축 같은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는 일정 부분 현실적인 걱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제 질서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원조에 의존하던 약소국이 아니다. 현재 한국은 경제력·산업력·군사력·문화력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 10위권 국가로 평가받는다. 반도체, 조선, 배터리, 자동차, 방산 등 제조업 경쟁력은 세계 최상위 수준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전략산업을 어떻게 국가 전략자산으로 활용하느냐다.
국제정치는 결국 힘의 논리다. 그리고 힘은 군사력만 의미하지 않는다. 첨단기술과 공급망, 제조 역량 역시 강력한 국가권력이다. 지금 한국은 복싱으로 비유하면 이미 라이트헤비급 체급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정신력은 아직도 플라이급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체격은 커졌는데 스스로를 여전히 약소국으로 인식하는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의 한한령 사태다.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 배치 이후 중국은 한국 드라마·K-POP 제한, 롯데 제재, 관광객 통제 등 사실상의 경제 보복에 나섰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중국 시장 없이는 한국 경제가 버티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한국 기업들은 동남아·미국·유럽 시장으로 빠르게 진출했고, K-콘텐츠는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확산됐다. 중국 의존도를 줄이는 과정에서 오히려 산업 체질이 강화됐다. 무엇보다 중국 역시 한국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반도체와 첨단 부품 공급망에서 한국의 역할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일본의 전략 물질 수출 규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의 수출을 제한하며 한국 반도체 산업을 압박했다. 국내에서는 '반도체 공장이 멈출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공급망 다변화와 국산화가 빠르게 추진됐다. 정부 역시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에 집중 투자했다. 그 결과 초고순도 불화수소 국산화에 성공했고, 일본 의존도도 크게 낮아졌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압박은 한국 산업의 공급망 자립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두 사례는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는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강대국들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전략 상품들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메모리 반도체, LNG선과 군함을 건조하는 조선업,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배터리와 방위산업은 단순한 수출품이 아니라 국가 전략자산이다.
특히 조선업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조차 조선업 쇠퇴로 인해 한국과 일본의 도움 없이는 해군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도체 역시 미국과 중국 모두 한국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한국은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 핵심 공급망 국가가 된 것이다.
군사력도 마찬가지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한국군은 재래식 전력 대부분에서 북한을 압도한다. 핵무기는 사실상 한·미 확장 억제 체제 아래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첨단 공군력과 이지스 구축함, 잠수함 전력, 정보 자산, 현무 계열 미사일 능력 등은 세계 상위권 수준이다. 글로벌 군사력 평가에서도 한국은 대체로 5~7위권으로 평가된다. 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북한이 쉽게 군사적 도발을 감행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중국과 일본 역시 한국을 함부로 군사적으로 압박하기 어려운 배경이다.
물론 한·미 동맹은 중요하다. 앞으로도 유지·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동맹은 종속이 아니다. 국익을 중심으로 당당하게 협상하고, 우리가 가진 전략산업과 기술력을 외교적 지렛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동맹의 자세다.
대한민국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했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도 드문 기적이다. 이제는 그 체급에 맞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중견국 외교란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전략산업과 군사력,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 이제 한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 스스로가 지나치게 위축돼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약소국의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 10위권 국가에 걸맞은 전략적 자신감이다.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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