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상해질수록, 사회 기득권 집단이 자신들의 치부나 음모를 숨기거나 가리기 위해 유명 스타들의 과거 행적을 돌출적으로 꺼내 드는 경우가 종종, 아니 매번 있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구사하는 재래식 기술 ‘이슈로 이슈를 덮는다’에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또 뭔가 있군, 하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보통은 서로의 술버릇을 감춰 주는 것이 상례다. 어젯밤 있었던 일, 그 험악했던 싸움도, 그저 술 마시고 벌어진 일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를 허락한다. 사람이 술을 먹다가 술이 술을 먹고 결국 술이 사람까지 마셔버린 결과라고 웃어넘기려 한다. 술에 대한 에피소드는 공소시효가 20년쯤 된다. 그러니 그 입들 좀 꽉 다물라.
강수연은 영화계 전설의 술꾼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시절의 강수연. (사진=부산국제영화제)
여배우 중 술에 관한 한 진정한 전설은 고 강수연이다. 기억하거니와 지금껏 이 여인과의 술 대적에서 남아나는 ‘남정네’들을 보지 못했다. 마시는 술의 양, 마시는 속도, 섞어 마시는 술의 가짓수 등등이 늘 상상을 초월했다. 술 좀 먹네 하는 사람들이 호기롭게 덤볐지만 모두 당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소주를 즐겨 마셨다. 소맥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체로 소주는 원샷이었다. 뭐 그 정도는 나도 따라가긴 했다. 나 역시 주량이 웬만큼은 됐으니까. 한 시간여쯤 술잔이 거나하게 돌 때 강수연은 술잔을 손등에 올려 마셨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술을 털어 넣는다. 소주잔을 손등, 손가락 위에 얹어놓아 보라. 맨정신에도 손이 살짝 떨리게 돼 있다. 그 상태에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마실 때 어지간해서는 술을 안 흘릴 수가 없다. 술이 흐르는 게 들키면, 강수연은 바로 벌주를 ‘때렸다’. 그녀처럼 손등으로 술을 마시면서 흘리지 않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강수연과 그렇게 술을 마시다 보면 늘 곤죽이 됐다. 몇 해를 걸쳐 술을 마셔본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그 앞에 앉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게 된다.
어느 날 그녀는 그런 나를 보고 깔깔대면서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동진은 내 앞에만 있으면 작아진대.” 그 ‘작아진다’는 말에,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었다. 나름 음담패설인데 음담패설로 들리진 않았다. 요즘 같으면 조심해야 할 어법이긴 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 한 얘기는 술자리 밖으로 갖고 나가면 안 되는 법이, 우리 술꾼들의 불문율이다. 동의하거나 말거나. 엊그제 함께 마셨던 ASEAN 전문가 K의 얘기가 맞다. 그녀는 나와 술친구 선후배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오갔던 얘기가 나중에 시시비비가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둘 간의, 사람 간의 신뢰 문제라고 말했다. 성인지 감수성의 법적 논쟁은 상대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수위가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명 여배우 J는 강수연의 뒤를 이을 만큼 술 실력이 남다르다. 깡마른 체구이고 도무지 어디로 저 술이 들어갔다 나오는지 짐작을 할 수 없을 만큼 마시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예전에 한 번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이 있었는데 (마감에 걸려 어쩔 수가 없었음에도) 그녀는 살벌하게 배시시 웃으면서 ‘오빠, 후래자삼배’ 하고 말했다. 그러곤 맥주 글라스에 소주를 콸콸 부었다. 한여름이었고 소주는 아주 차가운 상태였다. 뭐 이 한 잔 정도야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겠지, 했다. 내가 생각해도 꿀꺽꿀꺽 잘도 마셨고 잔을 자랑스럽게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또다시 콸콸콸콸 2배를 따랐다. 이거 한 잔만 더 마시면 끝이겠지 했지만 웬걸 3배마저 콸콸콸콸 따르고는 내 앞에 딱 내려놓고는 말했다. 자 마지막 잔! 그리고 그 공포스러운 눈웃음. 배시시. J가 내민 소주 후래자삼배에 난 그날 밤, 떡은 인간이 될 수 없지만, 인간은 떡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이후 꼬박 이틀간 골골거리며 다녔다.
배우 이미연은 유쾌한 술꾼이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어깨너머의 연인>의 한 장면. (사진=㈜싸이더스에프엔에이치)
내가 정말 섭섭한 것은 J가 나에게만 이러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나를 지극히 좋아하고 사랑까지(?) 하여 술을 ‘멕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숱한 사람들에게 술을 먹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하여 질투보다는 더 열심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아니고 J에게 ‘당한’ 남자들에게 어느덧 배시시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신문사 후배 R은 어느 영화제 개막식에서 J의 마수에 걸려 가방과 노트북, 핸드폰을 몽땅 버려두고 호텔방으로 실려 간 적이 있다. 그걸 찾아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R은 아직도 모른다. 누구였을까. 배시시.
영화가 흥청일 때는 술 먹는 여배우들도 많았다. 다들 즐겁게 망청대곤 했다. 구설수나 스캔들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활동이 뜸한 여배우 이미연은 술을 마시면 가장 유쾌하게 돌변한다. 술을 마다하지 않고 받아주는 것은 물론, 주변을 즐겁게 한다. 큰 입으로 연신 하하거리며 재밌게 마신다. 그 오래전, 그녀의 지정 운전자는 헤어지기 전의 김승우였다. 두 연인은 그때 좋아 보였다. 다 알다시피 김승우는 지금 다른 사람과 산다. 사람의 앞일이란 진정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이미연은 감독 강우석이 키운 배우인 셈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1990)는 한국 영화가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기 전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그녀의 영화 <넘버 3>(1997)는 추억이 됐다. <흑수선>(2001)과 <태풍>(2005)에서는 처절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이미연이 보고 싶다. 그녀의 ‘오빠 마셔!’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일본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가 쓴 소설을 영화화한 <국보>는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를 소재로 삼았다. (사진=미디어캐슬)
말을 급격하게 돌리는 것 같지만, 사람들이 그렇게나 인생 영화로 꼽는 재일동포 감독 이상일의 일본 영화 <국보>(2025)가 내겐 그다지 시원치가 않았다. 일상을 나처럼 대충대충 사는 사람들에겐 영화 속 인물들의 치열함이 잘 다가오지 않는 법이다. 그 반대로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 열심히 살면서 장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눈물의 영화가 되는 모양이다. 예컨대 동시통역사가 되기 위해 온종일 영어로 듣고 말하고 쓰고를 반복했던 친구들이 그럴 것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덴마크 왕립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홍지민 같은 친구도 <국보>를 좋아할 것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그럴 것이다. 이들은 술을 좋아하거나 흠뻑 취해보거나 그런 적이 없을 것이다. 자기의 업을 완성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술은 ‘웬수’일 수 있다.
<국보>를 보면서 엉뚱하게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자카야 ‘이쯔모’를 생각했다. ‘언제나’란 뜻의 이 술집은 지난 20여년간 (2002년에 열었다) 한남동에서 (처음엔 순천향병원 적산가옥을 개조한 집이었고 지금은 UN빌리지 앞 건물 2층에 있다) 한결같이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셰프는 이제 70대가 된 일본인 노구치상이다.
과거 이 ‘이쯔모’에서는 종종 술 시음회 같은 것을 열었다. 단골 중에서 엄선된 사람 7~8명을 초대한다. 그러면 일본에서 막 도착한 술도가의 주인이 지금 막 빚은 소주라며 자신의 ‘작품’을 내놓는다. 머리에 일본 사람 특유의 머리끈을 질끈 묶은 그는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앉는다. 사람들은 그가 부어주는 술을 한 잔, 두 잔 먹는다. 사람들 입에서 스고이, 오이시이데스,라는 소리가 나오면 이 술은 다음부터 이쯔모에 입하된다. 그 양조장 주인에게 당신의 술도가는 얼마나 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질문이 뭐가 어려운지 세 번 네 번 답을 피한다. 도무지 부끄러워서 얘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거의 다그치듯 묻고 또 물어서 얻은 답이 “아 우리는…우리는 200년이 조금 넘었스무니다. 챙피하무니다. 아직 내세울 만한 집이 아니무니다.” 일본 술도가 중에는 400년이 넘는 곳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이 일본에 상륙했을 때부터 양조장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일본은 완벽한 혈통 사회이고 유산 사회다. <국보>를 보면서 나 같은 술꾼들은 엉뚱하게도 일본의 오래된 양조장을 떠올린다는 얘기다. 이러니 영화를 제대로 보기나 하겠어? 엉터리 평론가 같으니.
서울 용산구 한남동 술집 이쯔모. (사진=오동진)
이제 불귀의 객이 된 강수연, 활동하지 않는 이미연과 다시 술 마실 날을 기대한다. 강수연과는 저 위에 올라가서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거기도 이쯔모가 있을 것이다. 이미연과는 이승의 이쯔모 같은 데서 마시고 싶다. J에게 연락을 안 하면 삐질까. 다들 <국보>의 인물들처럼 일가를 이룬 여배우들이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건배. 언제나, 올웨이즈, 이쯔모 건배. 세상이여 연예인들을 괴롭히지 말지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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