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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심심함을 즐기기
2024-01-18 06:00:00 2024-01-18 06:00:00
얼마 전 아침 식사를 마친 아이가 게임을 하고 싶다기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게임은 주말에 숙제를 끝낸 뒤에만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자 이번에는 TV를 보여달라더군요. 오전부터 동영상 콘텐츠를 보여주는 경우는 없기에 역시나 안된다고 답했지요. 연거푸 거절당한 아이는 별안간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아이참, 그럼 뭘 하라고! 할 일도 없고 너무 심심하단 말이야!”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학교도 학원도 방학이라 하루 종일 집에 있다 보면 그럴 법도 하겠지요.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다양한 스케줄로 하루가 가득 차 있던 때와는 사뭇 다를 테니까요. 책이라도 읽으라고 타일렀더니 이번에는 읽을만한 책은 이미 다 읽었다고, 안 읽은 책 중에는 재미없는 것들밖에 없다고 투덜거리더군요. 짜증을 내는 아이를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불평하지만 말고 잠깐이라도 좋으니 가만히 있어봐. 심심함을 즐겨.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심심함을 피하려 할수록 더 지루하고 재미없어지는 거야. 그래서 사람에게는 심심한 순간이 반드시 필요해. 심심해야 생각을 하게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정말로 재미있는 것을 보았을 때 재미있다고 느낄 수 있어.”
 
엄마의 잔소리에 아이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금방 쪼르르 튀어나와서 TV나 게임을 조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한동안 조용했습니다. 몰래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놀랍게도 책을 읽고 있더군요. 언제 심심하다고 투덜거렸나 싶을 만큼 책 속 세계에 푹 빠져든 아이를 보고 역시나 제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심한 것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오히려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말입니다.
 
하지만 흐뭇한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는 내심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어떠한가를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루 종일 손에서 핸드폰을 놓지 못하고, 크게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습관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접속하여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TV를 볼 때면 수백수천 가지의 콘텐츠를 번갈아 재생하며 ‘어디 재미있는 것 없나, 볼 게 너무 없네’라고 습관처럼 되뇌곤 하는, 결국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쉽사리 재미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말이지요.
 
돌이켜보니 저 역시 짜증을 내던 아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습관적으로 재미있는 것, 자극적인 것을 갈구했고, 어떤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쉬지 않고 무언가를 하곤 했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자극과 재미를 찾아 헤맬수록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점점 더 늘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자극이 많을수록, 그리고 강렬할수록, 점점 더 자극에 무뎌지면서 오히려 무료함이나 지루함에는 훨씬 취약해진 것이죠. 일종의 ‘도파민 중독’이랄까요. 아이에게 심심함을 즐기라고 말했지만, 정작 저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었죠. 심심함을 두려워하면서,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면서요.
 
새해가 밝은지 보름 남짓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이의 방학을 계기로 ‘심심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니다. 한동안 우울하고 무료한 감정에 시달리곤 했는데, 어쩌면 제 삶에 자극적인 요소가 지나치게 많은 것이 오히려 무기력과 무료함을 부추긴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해서요. 그러면서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새해에는 삶에서 오는 자극을 줄이고 심심함에 보다 익숙해지겠다고요. 아이에게 말한 ‘심심함을 즐기기’를 저부터 실천해야겠습니다.
 
한승혜 작가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권순욱 미디어토마토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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