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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15)비무장지대로 가자!
2022-10-25 15:07:11 2022-11-07 00:53:18
지난 비로 길 양 편의 논은 넒은 바다처럼 물에 잠겼다. 철없는 아이들은 낚싯줄을 던지고 있었고, 고기들도 물난리에 정신없이 덥석덥석 낚싯밥에 입질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생겼다. 생과 사는 어느 곳에도 있다. 생과 사는 같은 공간에 있고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다. 거리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영구차가 지나가고 또 결혼식이 열린다. 살아 있는 나는 길 위를 달리고 있고, 죽은 아버지는 나를 통해서 살아생전 가보지 못한 고향땅을 기필코 밟아보려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길 위에 쥐와 뱀의 사체가 즐비하다. 홍수가 나서 땅속에 살던 쥐와 뱀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보려고 길 위에 올라섰다가 차와 오토바이에 깔려 압사 당했다. 50여 년 전 사람들은 B-52 폭격기의 폭탄의 홍수를 피하려 땅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곳 빈목 터널의 지반은 대부분 석회암이라서 비교적 땅굴을 파기 용이했다고 한다. 지하 23m까지 파고 들어갔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 일행은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을 안내하는 가이드를 따라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핸드폰 손전등를 켜고 비좁은 지하 터널로 들어갔다. 지하 터널은 미로처럼 연결되었고 입구 근처에는 보초가 서있을 공간이 있었다. 어둡고 암울한 터널 안에서도 삶은 이어졌다.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 안에서도 새 생명은 태어났고 노인은 보호 받았다. 모여서 회의를 할 수 있는 회의실과 그 와중에도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이 배움을 계속할 공간이 필요했다.
 
마을 주민 60가구, 총 300명이 살았으며, 이곳에서 17명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미군의 공습을 피해서 1965년부터 땅굴을 파기 시작하여 미군철수가 가시화된 1972년까지 살았다. 미군의 무차별적으로 폭탄 홍수로 지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게 되자 마을 주민들은 아예 지하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땅굴을 파서 지하에 생활 시설을 만들고 지냈다고 한다.
 
지하수가 흐르는 곳에 우물과 수세식 화장실 그리고 병원까지 갖추고 있는 그야말로 지하 도시였다. 마을 주민 60가구, 총 300명이 살았으며, 이곳에서 17명의 아이가 태어났다고 한다. 주위에 미군 폭격으로 파인 웅덩이에는 그때의 아비규환의 소리가 웅웅거릴 뿐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바로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바닷가이다. 안에서 먹먹하던 가슴이 금방 바다를 보니 가슴이 활짝 펴진다.
 
역사관 전시실 입구에는 '삶과 죽음'이란 제목의 부도가 서이었다. 공중에서 폭격하는 비행기와 그 밑에서 폭격을 피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 모습 형상화한 작품이다.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중얼거리는 대사이다.  
 
냉전의 차가운 피가 혈관에 흐르는 미국 워싱턴 인사들은 테이블에 앉아 권련을 입에 물고 위스키 잔을 기울이며 카드를 돌리면서 명령을 하달했을 것이다. 그 명령은 즉시 집행되었다. 1966년 미국은 북부베트남에 엄청난 규모의 공중폭격을 했다. DMZ 바로 북쪽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 빈목 사람들은 무지막지한 폭격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땅굴을 파고 숨어들어야 했다.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프랑스군은 10월19일 하노이 통제권을 보응우옌 지압 장군의 수도연대에 넘겨주고 도시를 떠났다. 프랑스 철수 이후 베트남 문제를 다룬 스위스 제네바 협약으로 북베트남의 베트남민주공화국 지위를 인정하고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베트남을 분리하되, 2년 안에 남북 총선거를 해 베트남 민중이 선택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1일 호찌민 영묘에서 출발한지 20일 만에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던 북위 17도 선이 있는 동하에 다다랐다. 꽌찌 성의 성도 ‘동하’는 우리의 파주와 같은 17도선 아래 남베트남의 첫 도시였던 곳이다. 동하 북쪽을 흐르는 벤하이 강을 따라 월남과 월맹을 가르는 군사 분계선이 설치되었다. 벤하이 강의 남북 각각 5km 너비의 비무장지대를 정하였고 남쪽에는 미국 해병대 3사단이 주둔하던 곳이다. 그 바로 위에는 베트남 인민군이 4만여 명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곳은 1972년 3월 31일 부활절 공세에 베트남 인민군에게 넘어갔다.
 
우리는 방금 전 벤하이 강을 가로 질러 놓은 '히엔 르엉' 교를 건너왔다. 이 다리는 남북이 갈리면서 분단을 상징하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21년을 보냈지만 지금은 다시 이어진 다리! 히엔 르엉 교를 건널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다리 중앙의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에 서서 조헌정 목사님과 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악수장면을 재현했다.
 
난간은 정확히 반으로 나눠 남쪽은 노란색, 북쪽은 파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이곳에도 판문점처럼 전쟁 당사국인 미군과 북베트남이 만나 회담하던 장소가 서로 억지 주장만 늘어놓던 장소답게 휑하니 서있었다. 마음이 갑자기 울적하여 문익환 목사 작사의 ‘비무장지대로 가자!’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비무장지대로 가자 비무장지대로 가자
얼룩진 군복은 벗어라 여기는 비무장지대라
비무장 지대로 오라 비무장 지대로 오라
따발총 계급장 버리고 오라 비무장 지대로
팔씨름 샅바씨름 남정네들은 힘겨루기
널뛰기 그네타기 너울너울 춤추며
너희는 백두산까지 우리는 한라산까지
 
베트남의 북위17도선에 서서, 해방을 맞이했지만 외세에 의해 멋대로 그어진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머리에서 지워본다. 하나의 나라가 되어 살을 부비며 평화롭게 살았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통곡할 역사! 과연 내 발자국은 38선의 끝자락이라도 지우는데 이바지할 수 있을까? 휴전선을 원한 품고 흐르는 임진강과 임진강 독개다리는 끊어진 채 이어질 줄 모르고 아쉬운 발걸음만 멈추게 하네!
 
계속 비는 쫄딱 맞으면서 달리고 있지만 운 좋게도 홍수가 나보다 몇 발 앞서갔다. 지금은 다낭 쪽에서 태풍이 몰려온다는 뉴스이다. 과연 이 여정 내내 나는 계속 운이 좋을까? 아스팔트 위에서 쥐포가 되어버린 쥐들과 뱀의 사체들!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지만 운 좋게 전쟁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다. 과연 나는 여생도 운 좋게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바라 건데 우리 후손들도 평화로운 세상에서 마음껏 저마다의 재능을 뽐내며 살 수 있기를!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평화달리기 20일차인 지난 20일 베트남 분단의 상징인 히엔르엉교를 건너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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