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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태의 경제편편)한국 통상외교의 참사
2022-09-07 06:00:00 2022-09-07 06:00:00
미국을 방문했던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3일 귀국했다.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착잡한 방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때문에 마치 납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다니는 기분이었을 듯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배신당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통상외교 당국의 ‘무심함’ 때문에 2중의 고통을 당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정 회장은 지난 5월 한국을 방문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통 큰 투자 약속을 내놨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대차를 실망하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이든 대통령이 진심으로 고마워한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미국은 현대차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때렸다. 미국이 새로 제정한 소위 인플레감축법에 따르면 현대차가 미국에 수출하는 전기차는 2024년까지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배제된다. 모두 한국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현대차에는 그야말로 의문의 여지가 없는 배신이다.
 
현대차는 미국 조지아에 짓는 전기차공장 완공 시기를 2025년에서 2024년으로 앞당기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023년과 2024년에는 가격경쟁력에서 밀리고 전기차 수출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문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는 더욱 한심하다. 미국의 인플레감축법 통과 움직임은 7월 말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외교부나 산업자원부 등 통상당국은 별다른 대응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사안의 엄중함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인식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다고 여겨진다.
 
미국의 권력 서열 3위로 일컬어지는 펠로시 하원의장이 대만을 거쳐 한국에 왔을 때 윤석열 대통령은 휴가 중이라며 만나지 않았다. 펠로시 의장은 김진표 국회의장만 만나고 돌아갔다.
 
만약 정부 차원에서 인플레감축법의 독소조항을 제대로 인지하거나 미국 의회와 집권 민주당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윤 대통령은 휴가 중이지만 펠로시 의장을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인플레감축법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법안 재고를 당부했을 것이다. 김진표 의장도 이 법에 대한 한국의 걱정을 전달하고 의장으로서 영향력 행사를 촉구하며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펠로시 의장은 마음 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국 의회는 ‘동맹국’ 한국에 대한 아무 배려나 부담감 없이 일사천리로 문제의 법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뒤늦게 사안의 엄중함을 인지했다. 그렇기에 윤석열 대통령이나 김성한 안보실장, 박진 외교부 장관 등 많은 당국자가 나서서 미국에 우려를 표시했다. 그렇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후였다. 뒤늦게 손을 흔드는 모양새였다. 한국 통상외교의 대형 참사라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돌아보면 한국의 통상외교에 사령탑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자세로는 앞으로 벌어질 갖가지 통상현안에서 100전100패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국 정부는 뒤늦게 대응하겠다면서 요즘 부산을 떨고 있다. 그러나 법은 이미 의회에서 통과된 마당에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한국의 입장을 반영시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한국 정부처럼 시행령을 입맛에 맞게 만들어 한국을 빼줄 수 있을까? 미국이 법치국가라면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법안 통과 자체를 나름의 업적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현대차와 정부가 긴밀하게 의논하면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요즘 정부가 좋아하는 ‘원팀’을 만들어 대응하는 것이다. 현대차가 바이든 대통령에 약속한 투자계획을 늦추거나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바꿔 맞불을 놓는 등의 방법도 있다. 정부가 결심하면 된다.
 
그렇지만 ‘한미동맹 복원’을 외치며 미국 앞에서 새가슴이 되는 한국 정부가 그런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동맹복원을 외치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추상적으로 복원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실익을 잃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통상당국자들에게는 믿음이 안 생긴다. 따라서 이번 같은 통상외교의 참사를 초래한 관계당국의 책임부터 물어야 한다. 태만하지 않고 통상현안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인물들로 전면 교체할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자세를 가다듬어 대응 카드를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차기태 언론인(folium@nate.com)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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