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왼쪽)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사진=연합뉴스)
[뉴스토마토 임유진 기자] 1997년 제15대 대선 직전 한국정치사에 '이종교배'라는 생경한 한 장면이 펼쳐졌다. 김대중(DJ) 새정치국민회의 후보가 김종필(JP) 자유민주연합 총재와 'DJP 연합'에 전격 합의했다. 민주화 투쟁의 상징인 DJ가 5·16 군사 쿠데타 주역이었던 JP와 손을 잡는 것에 대한 비판도 거셌지만, 호남 고립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만년 2인자에 머물렀던 JP도 DJ가 필요했다. 결국 두 사람은 내각제 개헌과 함께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이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는 신의 한 수가 됐다. 호남과 충청의 결합에 이인제 변수로 영남마저 분열하면서, 대권 삼수생이었던 DJ는 39만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6%포인트 격차의 신승이었다.
DJ 당선으로 국무총리가 된 JP는 경제부처 장관 임명권까지 행사했다. 권력분점을 지켜보던 DJ의 가신그룹인 동교동계의 반발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삐걱댔다. 의원내각제 개헌 약속마저 틀어지면서 DJP 연합은 2년 만에 깨졌다. '권력은 부자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역사적 명제가 다시 한 번 확인된 사례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사진=연합뉴스)
비슷한 장면이 이번 20대 대선에서도 연출됐다.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DJP 모델을 고스란히 차용했다. 두 사람은 지난 3월 대선 사전투표를 하루 앞두고 공동정부에 근간을 둔 단일화에 전격 합의했다. 이들은 "국민통합정부는 대통령 혼자서 국정을 운영하는 정부가 아닐 것"이라고 선언했다. 공동선언문은 "국정 파트너와 함께 국정운영을 함께 해나가겠다", "인수위원회 구성부터 공동정부 구성까지 함께 협의" 등의 문구로 채워졌다.
윤 당선인은 0.73%포인트 격차로 이재명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간신히 당선됐다. 역대 최소 격차였던 15대 대선 기록을 깼다. 당장 안 위원장의 대선 승리 기여를 놓고 의견이 갈라졌다. 단일화가 없었으면 졌을 것이란 분석과 함께 단일화가 오히려 역풍을 낳아 호남과 중도층의 이탈을 배가시켰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대선까지 단 6일을 선거 운동하고 공동정부 지분을 가져가려 한다는 비판도 더해졌다.
두 사람은 일단 인수위 구성까지는 순항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인수위원 24명 중 8명을 안철수계 인사로 채웠다. 국무총리 직을 마다한 안 위원장은 대신 내각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영향력을 이어가려는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행안부, 교육부, 과기부, 보건복지부, 중소기업부 등이 안 위원장 몫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인수위 안팎을 돌았다.
이상기류가 포착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4일 마무리된 조각에서 18개 부처 장관 후보자 중 안철수계 인사는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공동정부 선언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안 위원장은 1·2차 인선 발표가 있었던 지난 10일과 13일 "인선 과정에서 제가 전문성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조언을 드리고 싶었지만 그런 과정은 없었다", "결정은 인사권자가 하는 것이고, 책임도 인사권자가 지는 것 아니겠느냐" 등의 뼈있는 발언들을 내놨다. 마지막 남은 내각 인선 두 자리가 발표된 14일에는 아예 업무 보이콧을 했다.
새정부 내각 인선이 마무리된 날 안 위원장과의 공동정부에 대한 질문 세례만 쏟아지자, 윤 당선인도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세 차례의 질문 모두 공동정부 얘기로 채워지자 질문을 끊으며 "그 정도 하고 제가 답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특정 인사를 배제하거나 한 사실이 없다", "좀 이해가 안 된다. 아무 문제 없다"고 언짢은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안 위원장이 선제적으로 공동정부 합의 파기를 선언할 것이란 관측까지 제기됐다. 사실 공동정부 합의는 '선언'에 불과해 안 위원장의 지분을 담보하거나, 보장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없다. 상호신뢰만이 유일하다. 민주당 원로인 유인태 전 의원은 이를 두고 "안 위원장이 팽당한 것"이라며 "과거 DJP(김대중·김종필) 연합 때는 JP한테 경제 쪽은 다 줬었다. (안 위원장이)딱하다"고 했다.
안철수 인수위원장(왼쪽)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사진=연합뉴스)
파국 수순을 밟는 듯 했던 윤 당선인과 안 위원장은 14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함께 하며 사태를 봉합했다. 다음날인 15일 안 위원장은 다시 인수위로 출근했고, 기자들과 만나 "공동정부 정신이 훼손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만, 다시 국민들께 실망을 끼쳐드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공동정부 정신이 훼손됐지만 현 시점에서 갈라서기에는 두 사람 모두 부담감이 컸다.
단 하루 만에 파업을 푼 안 위원장은 몸을 바짝 낮췄다. 안 위원장은 윤 당선인이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 참석하자 "당선인께서 이렇게 많이 참석해주시는 그런 인수위는 지금까지 역사상 없었다"며 "이렇게 많은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 자체가 국가와 국민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에서 나오는 일"이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또 "그런 당선인의 기대에 부응해 저도 최선을 다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나갈 수 있는 국정과제를 제대로 만들겠다는 다짐을 한다"며 사실상 '윤비어천가'를 읊었다. 평소 수줍음이 많은 안 위원장의 성격과 화법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주위의 설명을 들으면 안 위원장이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자신의 사람들을 입각시키지 못해 리더십이 훼손됐다. 그렇다고 인수위원장 직을 던지고 공동정부 합의를 파기하면 또 다시 '철수정치' 이미지에 갇히는 꼴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이 아닌, 최악을 피하자는 심정으로 차관급 지분으로 눈을 돌렸을 가능성이 있다. 윤 당선인과의 회동과 관련해 안 위원장은 “앞으로 국정 전반에 대해서 인사라든지 정책에 대해서 심도 깊게 논의를 하기로 했다”며 “특히 보건의료, 과학기술, 중소벤처 그리고 교육 분야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성을 가지고 더 깊은 조언을 드리고 관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배현진 당선인 대변인은 "향후 차관급 인사를 비롯한 대통령실 직무를 위해 필요한 여러 직제상 인사에 반영하겠다"고 했다.
다만 어렵사리 갈등을 봉합했다고 해도 두 사람의 갈등은 언제든 재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역사상 공동정부는 전례가 없고, 지속하기도 힘들 것이란 이유에서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뉴스토마토>와의 통화에서 "권력의 속성상 공동정부를 장기간 운영하는 것은 어렵다"며 "DJP 연합은 성사도 어려웠고 총리 인준 문제로 JP가 6개월 간 서리를 하는 등 초반부터 문제를 드러내다가 2년 만에 끝이 났다"고 짚었다. 최 원장은 "집권 초기 통합이 최대 화두고 각자의 필요성 때문에 공동정부를 이어가지만, 정권이 궤도에 오르면 각자 갈 길을 가게 된다"며 "공동정부 분열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안 위원장의 측근인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해 "공동정부 정신이 훼손됐고 그 훼손된 것에 관해서 서로 대화를 해서 봉합이 됐다. 이 정도가 현실"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안 위원장이 윤 당선인의 인선에 반발해 업무 보이콧에 돌입했을 때 장시간 대화를 나눈 당사자다.
임유진 기자 limyang8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