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기자
(시론)양육을 외면하는 본성의 정치
2021-12-16 06:00:00 2021-12-16 06:00:00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인재영입에 사활을 걸었으나, 보기 좋게 망했다. 민주당은 조동연 교수를 1호 인재이자 상임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가 사생활 논란으로 후보가 사퇴하는 참사를 겪었고, 국민의힘은 노재승씨를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했다가 그의 과거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같은 참사를 겪었다. 선거철이면 반복되는 인재영입은 일종의 정치쇼다. 물론 정당이 새로운 정책의 실천을 위해 해당 분야의 뜻이 맞는 전문가를 영입하고, 정당의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상징적으로 인재를 영입하는 것 자체는 악행이 아니다. 
 
지난 몇 주간 한국사회는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한 조동연과 노재승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 때문에 시끄러웠고, 국민은 꽤 많은 감정을 소모해야 했다. 실제로 조동연씨 논란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했던 문제는, 그가 정말 우주전문가나 항공전문가인가 하는 점이었는데, 이런 문제를 논의해볼 새도 없이 그는 여론재판을 통해 사퇴당했다. 과연 조동연 교수가 여성과 청년 그리고 과학과 안보를 모두 아우르는 적합한 인재인지를 여러 전문가들이 검토해볼 시간만이라도 주어졌다면, 조동연 논란은 오히려 한국 선거판에 아주 좋은 선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재승도 마찬가지다. 
 
정당의 인재영입은 계속돼야 한다. 선거철에만 이뤄지는 인재영입은 잘못이다. 인재영입이 건강하게 지속돼야, 한국 정당의 후진성이 극복될 수 있다.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한국사회에서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묵묵히 일해왔으나 좀 더 효율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은 사람들이 정당의 인재영입을 통해 정치에 발을 담글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 국회의원이 말했듯이 이런 식으로 영입된 인재들은 “일회용 티슈처럼 쓰고 버릴 사람들”이 될 것이다. 
 
민주당은 청년 세대의 표를 얻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다. 조동연 교수 이후 영입한 인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도대체 이들이 어떻게 과학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 가지 사실은 이들 중 조동연 교수와 김윤이 대표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근무하는 민주당 송영길 대표의 여동생과 책을 함께 썼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기술정책 전문가인 송영길 대표의 동생이 인재를 추천하는 일이 꼭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추천된 두 인물이 모두 논란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민주당 선대위 안에서는 요즘 이재명 캠프의 청년 인재영입이 청년에게 박탈감만 안긴다는 비판이 나온다고 한다. 서울대, 하버드, 카이스트 등의 소위 잘나가는 청년들만 영입해서 청년을 위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만들려던 민주당의 꼼수를 적확하게 지적한 비판이다. 민주당의 소위 금수저 청년인재영입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민주당과 이재명 캠프의 청년정책의 실체가 이렇듯 철학 없는 인기영합주의라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고통받는 청년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기득권 정치인들의 안일한 태도다. 민주당은 12일 추가로 4명의 청년을 영입했고, 민주당과 접점을 가지고 활동해온 다양한 분야의 청년을 데려왔지만, 이제 아무도 이재명 캠프의 인재영입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여성과 청년은 시대정신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정치에 입문하려면, 충분히 기득권에 속해 있던가 아니면 여성 혹은 청년이라는 생물학적 표식을 지녀야 한다. 여성과 청년은 생물학적 개념이다. 여기서 생물학적 개념이라는 의미는 이 두 범주가 노력이나 훈련에 의해 변화할 수 없는 결정론적 운명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적 이념과 대안을 가지고 있어도, 남성이거나 중년인 정치신인은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에서 벗어나 있다. 단지 그가 남성이고 중년이라는 이유로, 그는 정치의 화려한 무대에서 외면당한다. 한국의 정체성 정치는 생물학적 정치로 변질되었다. 정체성 정치조차 스스로를 주변에서 고립시켜 수권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생물학적 정치는 아예 우생학적 차별을 정체성으로 포장해 정치에 차별을 고착화한다. 2030의 한 표가 아쉬운 한국의 거대양당이 청년 인재영입쇼로 더럽혀 놓은 한국 정치의 무대는, 정의당의 젠더 정치와 결합해 한국사회를 생물학적 차별과 백래시로 물들이고 있다. 대한민국은 생물학을 정치적 이념으로 가져다 쓴다.
 
여성도 청년도 그 어떤 생물학적 범주로 구분 짓는 정치도,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는 최근 30대 최연소 총리를 퇴출시키며 청년 정치의 허무한 결말을 맞이했다. 생물학적으로 젊다는 이유로, 한 정치인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없다. 그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이 새롭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1986년생 제바스티안 쿠르츠는 최연소 총리였지만 신자유주의의 화신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구적이었고, 심지어 네오나치 정당과 연정도 했다. 비리혐의로 물러났지만, 생물학적으로 젊은 쿠르츠는 재기를 노리고 있다. 트럼프는 나이라도 있는데, 쿠르츠에겐 그런 제약도 없으니,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이제 청년정치가 정답이 아니라고 확신할 것이다. 
 
얼마전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긴 16년의 총리직을 마치고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퇴임 당시 그의 지지율은 80%였다. 독일의 어린이들은 남성이 넥타이를 매고 총리직을 수행하는 모습을 어색해 한다고 한다. 그들은 여성과학자 총리를 16년동안 매일 봐왔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동독에서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연구원으로 12년간 일하다 36세가 되던 해인 1990년 독일 통일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5년 간의 정치 훈련을 마치고 2005년 총리에 취임한 그는 결코 화려한 언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묵묵한 실천력으로 독일사회를 이끌었다. 아마 전세계의 정치리더십은 메르켈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그건 역사가라면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복지국가 스웨덴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에른스트 비그포르스는 1881년 태어나 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강사로 재직하다 38세가 되는 해인 1919년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스위스 사회민주당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했으며, 잠정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으로 사회민주당의 철학을 완성했다. 그의 잠정적 유토피아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에 가치와 이념을 적용해 구체적 정책을 도출하려던 시도였다. 비그포르스는 정당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사는 사람들의 갑갑한 마음, 즉 “이것보다 좋은 세상이 어딘가 있을텐데”라는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꿈에서 출발한 정당은 반드시 그 현실에서 제기되는 구체적이고도 절실한 쟁점을 붙잡고 이를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책으로 완성해야 한다. 비그포르스는 대통령도 총리도 아닌 재정부 장관으로 스웨덴의 체질을 바꾸는 정치를 해냈다.
 
정치인으로 존경받는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 치열한 훈련의 과정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굳이 메르켈과 비그포르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 모두 정치인으로 기나긴 훈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 대통령이 되어, 한국사회의 변화를 이끌었다. 어느날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 정치인이 사회에 건강한 변화를 이끈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이 정치계에 신선한 변화를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한 사회를 이끌기 위해선 정치라는 분야에서 단련돼야만 한다. 그래서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인재영입쇼는 더더욱 정치에 해롭다. 왜냐하면 이미 큰 뜻을 품고 정당에서 열심히 훈련하던 이들에게 좌절만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모든 정당은 모두 양육이 아니라 본성에 의지하는 아마추어 정당이다. 정당이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가 되지 못한다면, 한국 정치는 결코 단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양육보다 본성을 우선시하는 한국정치의 견고한 문화는, 한국사회에 이미 굳건히 뿌리내린 교육과도 관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회는 학벌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본성의 사회다. 그 학벌을 유지하는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기 보다는 이미 선별된 좋은 인재를 선출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사회는 인재의 능력보다 그의 대학졸업장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쩌면 학벌사회에 대해 가장 할 말이 많을 이재명 후보의 캠프조차, 하버드·서울대·카이스트라는 스펙을 인재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이 사태야말로, 우리가 이번 인재영입 논란에서 주목해봐야 하는 점일지 모른다. 한국사회는 사람의 성장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계속되는 일상에서, 어느새 모든 사람을 그의 생물학적 본성으로 판단하고 차별하고 있다. 양육이 아니라 본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 정치와 그런 정치가 만든 사회, 어쩌면 우리가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인지 모른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heterosis.kim@gmail.com)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지난 뉴스레터 보기 구독하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