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음악 없는 세상
입력 : 2021-08-02 06:00:00 수정 : 2021-08-02 06:00:00
일상이 위협받았던 작은 순간을 기억한다. 두렵기보다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2012년 여름, 태풍 볼라벤이 한국을 강타했다. 볼라벤이 직격하던 그날 밤, 나는 제주의 바닷가에 있었다. 과연 자연의 힘은 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사이 숙소 지붕이 뜯겨나가고 사람 몸뚱이만 한 바위가 도로로 날아들었다. 전기는 물론 각종 시설 또한 무사할 리 없었다. 아침이 되자 통신도 끊겼다. 숙소 거실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의 눈빛은 불안했고 호흡은 무거웠다. 완전한 고립이 주는 두려움의 공기 비슷한 것이 공간을 채웠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다음날 아침, 한 자리에 모인 등장인물들의 표정이었다.
 
뭘 할 수 있을까 하다 전기가 끊기기 전까지 충전해뒀던 블루투스 스피커 생각이 났다. 여행 갈 때 스피커를 챙기는 게 일상적이지 않았던 때다. 전화와 스피커를 연결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쓰기 전인지라, 휴대전화에 꽤 많은 음악이 저장돼 있었다. 음악을 틀었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경쾌한 전주에 이어 김광석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타고 몸속으로 흘렀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 순간 누그러지던 중압감을. 생기가 돌아오던 눈빛을. 비로소 활기를 찾던 호흡을. 그 순간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냉장고 속 음식을 모두 꺼내 요리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술판을 벌였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낮 내내 취했다. 음악 한 줄기이 단절된 일상을 복원했다. 음악이 갖고 있는 힘을 그토록 생생히 체험한 적은 없었다.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 이 지긋지긋한 날이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헛된 기대였다. 감염자 수는 연일 최고치를 찍는다. 오히려 4단계가 발동되며, 저녁에 4명이 모일 수 있던 얼마전이 좋은 시절처럼 느껴진다. 우리 사회의 짜증과 분노 지수도 체감상 극에 달하는 것 같다. 온라인 상에서 늘 싸울 거리를 찾고 분노할 대상을 찾아 나서는 것이야 한국 인터넷 문화의 ‘종특’이니 그러려니 하자. 헌데 이 짜증을 달래줄 절호의 이벤트, 올림픽을 두고도 어떻게든 분노를 해소할 거리를 찾아 나서는 것 같다. 안산의 숏컷 머리를 놓고 벌어지는 작태는 그 정점이다. 폭염과 휴가철이 겹치는 요즘, 어딜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답답함이 이런 광기 비슷한 걸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여름은 페스티벌의 계절이다. 야외에서, 시원한 체육관에서 이런 저런 페스티벌이 청춘을 불러 모은다. 호르몬을 뽑아낸다. 아이돌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페스티벌부터, 음악 애호가들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는 야외 록 페스티벌까지 다채롭다. 공연 산업의 절정이자 기획자들의 꿈이며, 팬들의 로망이다. 2년째, 페스티벌의 계절은 멈춰 섰다.
 
이해할 수 없는 정책 탓에 산발적으로 열리던 공연들마저 중지됐다. 생전의 이건희 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나훈아의 부산 공연도 결국 논란끝에 연기됐다. 지난해 ‘테스형’을 목놓아 외치던 대중의 반응도 싸늘했다. 나훈아라는 거물이 다 죽게 생긴, 아니 이미 죽어가고 있는 공연 산업 종사자들의 타개책을 마련해주리라는 기대마저 꺾이고 말았다. 과연 올해 안에 집단 면역이 생길까? 설령 그렇다 한들 ‘숫자’에 목숨 거는 방역 정책이 공연을 허락할까? 정확히 말하면, 뮤지컬이나 클래식과 달리 ‘법으로 정한 공연장’ 이외에서 열리는 대중음악 콘서트를 허락할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면 나도 모르게 담배를 찾게 된다.
 
공연은 음악이 가진 힘을 가장 극대화하는 장치다. 실시간성과 대면성이 주는 위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세기와 더불어 음반 산업이 탄생했지만, 수천년동안 이어온 공연에 대한 수요는 음반에서 스트리밍으로 넘어온 최근 오히려 더 커졌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기술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음악을 더 쉽게 들을수록, 공연을 보고 싶다는 욕구는 커지는 것이다. 코로나19  이전 공연 산업에 대한 많은 통계들은, 이를 생생히 보여준다.
 
4단계 와중에도 어떻게든 사람들은 만난다. 마신다. 다른 나라들 처럼 봉쇄는 아니니, 최소한의 숨통은 있다. 그럼에도 분노와 짜증의 체감 온도가 높은 이유는 공연으로 상징되는, 숫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 막혀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한다. 볼라벤이 몰아친 2012년 여름의 아침처럼, 생생한 연주와 목소리가 사회에 스며드는 날은 언제일까. 코로나19 종식과 거리가 멂에도, 미국과 유럽에서는 다시 대규모 공연이 돌아왔는데 말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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