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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실제로 본 ‘이건희 컬렉션’ “한국을 문화 강국으로”
현대기술 활용해 기증품 가치 높여
‘세기의 전시’ 베일 벗자 한달 치 매진
2021-07-29 17:20:40 2021-07-29 18:40:16
[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장맛비가 잦아들고 인왕산이 자태를 드러낸다. 기차바위, 코끼리바위, 치마바위 곳곳에 낀 운무가 98인치 삼성 로고가 박힌 TV 밖으로 흘러나올 듯했다. ‘타임랩스’(일반 속도로 플레이할 때 시간은 더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카메라 기술)로 돌아가는 화면은 곧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진다.
 
27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 입구에 들어서니 초대형 화면이 관객들을 맞는다. 해금 연주곡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왕산을 거닐다라는 제목의 영상.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들은 올해 5월말~6월 초 나흘간 비 갠 직후 인왕산을 촬영했다. 510초 분량의 이 영상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1751(영조 27) 5월 하순(음력), 붓에 먹을 적시며 높이 338.2m의 바위산을 바라보는 겸재의 시선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제216호).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앞서 19일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이건희 컬렉션이 공개되자 삼성 기술력과 디자인 철학의 기원이자 유래는 문화유산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토기, 도자기, 금속, 조각, 서화, 목가구 등 주요 문화재와 유물, 한국 근현대 문화유산을 아우르는 세기의 기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간 기증 작품이 일부 공개된 적은 있지만, ‘이건희 컬렉션대표작들로만 구성한 대규모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와 미술 작품 등 총 135점이 출품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건희 홍라희 부부가 처음으로 수집한 국보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덕산 출토로 전해지는 청동방울4577점을 모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을 열고 있다. 19951998년 호암미술관과 호암갤러리에서 세 차례 진행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와 연결되는 전시다.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당시 삼성 측 전시에서도 인왕제색도를 비롯 일본에서 빌려온 수월관음도를 최초로 선보이는 등 우리 문화유산의 자긍심을 일깨웠다한국을 문화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건희 회장의 업적을 기리고자 전시명을 그대로 살렸다고 설명했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전경.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하이라이트 인왕제색도바로 옆에는 단원 김홍도 추성부도가 걸려있다. 180560세 김홍도가 중국 북송의 문인 구양수가 쓴 추성부의 쓸쓸한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을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선비를 불쑥 다가오는 죽음에 비춰낸 작품이다.
 
영상을 활용한 인왕제색도를 포함해 내부에는 현대기술로 기증품의 가치를 돋보인 면모들도 엿보인다.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앞에는 엑스레이로 촬영한 터치스크린이 비치돼 있다. 손가락을 갖다 대면 천수관음보살의 밑그림, 채색, 안료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44개 손에 달려 있는 포도·약그릇·화살 같은 세밀한 밑그림도 살피는 것이 가능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기존 보유 고려불화 1수월관음도와 동일하게 전통회화 채색기법 중 뒷면에서 칠하는 배채법을 사용했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확인했다.
 
고려 불화 ‘천수관음보살도’ 앞에는 엑스레이로 촬영한 터치스크린이 비치돼 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노력이 엿보이는 석보상절 권11(보물)’월인석보 권11·12(보물)’, ‘월인석보 권17·18’는 전시장 가운데 펼쳐져 있다. 15세기 훈민정음 표기법, 한글과 한자 서체 편집 디자인의 미학을 살펴볼 수 있다. 고려 11세기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권249(국보)’는 대장경 초기 원형을 잘 보여준다. 이 회장은 생전 금속활자는 세계 최초의 하드웨어이며 한글은 기막히게 과학적인 소프트웨어라며 글자 관련 고문서 수집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석보상절', '월인석보'가 펼쳐져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내부 중앙.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병의 형태가 떡을 칠 때 사용하는 나무 몽둥이 떡메처럼 생겨 떡메병으로 불렸다는 18세기 조선시대 백자 청화 산수무늬 병(보물)’은 넉넉하고 유유자적한 정취로 관객들을 맞는다. 6세기 삼국시대 일광삼존상’(국보)부터 통일신라 9세기 부처(보물)까지 8cm 정도 크기의 작은 불상 6개는 나란히 서서 성스럽고 고결한 느낌을 준다. 전시 말미쯤 배치된 조선 19세기 십장생도 10폭 병풍은 흔히 알고 있는 해, , , , 소나무 외에 대나무와 복숭아까지 더해져 오늘날 힘든 시기 활기를 불어넣듯 생명력이 넘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무가지보(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들이 널려 있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가장 그림 값이 비싼 한국 작가들의 명작을 감상할 수 있다. 국내 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쓴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장욱진, 유영국 등의 희귀 명작들이 전시돼 한국 미술 명작이란 부제에 고개를 끄덕하게 된다.
 
100억원에 달하는 김환기 산울림’, 1950년대 삼호그룹 회장 자택에 걸렸다가 이 회장이 소장한 김환기 여인들과 항아리’, 1990년 발간된 이중섭 화집 수록 후 거의 전시된 바 없는 황소등은 감상 희소가치가 높은 대표작들이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주축으로 한국 작가 34명의 주요작 58점을 먼저 선보인다.
 
가히 세기의 전시라 할 만큼 현재 전시 예매(무료)는 치열하다. 30분당 20명 예약을 받는 국립중앙박물관은 828일까지 예약이 완료된 상태다. 시간당 30명 예약이 가능한 국립현대미술관 역시 812일까지 예약 접수를 마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9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은 내년 313일까지 전시 일정을 이어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한국 미술 명작'을 찾은 관람객들. 사진/뉴시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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