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이희호 여사 유언의 무게
입력 : 2019-06-15 06:00:00 수정 : 2019-06-15 10:01:26
최한영 정치부 기자
한 사람의 유언은 때로는 그 시대를 대변하기 마련이다. 작가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당시, 왕실의 위패를 들고 강화도로 들어온 늙은 선비가 강화산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자 자살하며 남긴 유서 글귀를 이렇게 썼다. "아들아, 너는 목숨을 귀하게 여겨 몸을 상하게 하지 마라. 고향에 조용히 엎드려서 세상에 나오지 마라." 소설 속 이야기지만,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절망감과 나라에 대한 원망이 구석구석 스민다.
 
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유언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들어있다. 모리 슈워츠 미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자신이 루게릭병을 앓게 된 것을 알고 제자 미치 앨봄을 매주 화요일 만나 가족, 사랑, 용서 등을 소재로 대화를 나눈다. 모리 교수는 줄어드는 시간 속 제자 미치와 대화하는 것으로 죽음을 준비한다. 제자와의 마지막 대화에서 모리 교수가 건넨 "자넨, 착한 영혼을 가졌어. 자네를 사랑하네"라는 인사는 타인을 착취하는 일을 하지 않기로 맹세하며 가르침의 길을 평생 걸었던 그의 인생과 겹친다. 이 따뜻함은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많은 이들의 유언 중 개인적으로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가 기억에 남는다. 김 추기경은 평생 천주의 품에 의탁하면서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물론 이후로도 사회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의 각막을 기증하며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실천한 김 추기경이 남긴 유언은 다름아닌 '감사'와 '사랑'이었다. 자신이 베푼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끝까지 자신을 낮췄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저녁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평화센터에 따르면 이 여사는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제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하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 여사는 김 추기경과 같이 '감사'와 '사랑'에 더해 평화통일이라는 과제를 남겼다. 고인의 열망은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 사람들의 마음에 무겁게 자리잡는다.
 
이 여사의 죽음을 계기로 한동안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남북대화가 재개될 분위기가 엿보인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2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판문점 북측 통일각으로 보내 이 여사에게 보내는 조의문·조화를 전했다. 김 부부장은 "이 여사는 민족 간 화합·협력을 위해 애쓰셨다"며 "남북 간 협력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뜻도 전달했다.
 
사람은 갔지만 말은 남았다. 남편의 뒤를 따라간 이 여사의 유언이 향후 남북관계에 어떻게 작용할지 지켜볼 일이다.
 
최한영 정치부 기자(visionchy@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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