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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의세상읽기)정의(正義)를 위한 물리학
2019-05-24 06:00:00 2019-05-24 06:00:00
남루한 차림으로 전국을 누비는 당돌한 소년이 사또 앞에서 호령을 한다. 이방은 어이없어 하면서 "저 놈을 당장 옥에 처넣어라!"고 하명한다. 하지만 소년은 당황하지 않는다. 웃음 띤 얼굴로 조용히 둥근 구리 패를 앞으로 내민다. 이와 동시에 육모 방망이를 든 졸(卒)들이 "암행어사 출두요"라고 외치며 담장을 넘어와 못된 관리들을 두들겨 팬다. 
 
만화책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소년은 암행어사요, 그가 내민 구리 패는 마패다. 만화의 독자들은 마패가 그렇게 좋았다. 만화책을 읽던 소년에게 마패는 암행어사가 정의의 사도라는 증표이자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암행어사만 마패를 들고 다닌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명을 받고 지방에 파견된 관리들도 마패를 가지고 다녔다. 마패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증명서였던 것이다. 마패에 말이 세 마리 그려져 있다면 자신과 수행원 그리고 짐을 싣는 말을 포함하여 모두 세 필의 말을 사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의 정의와 권력의 원천은 마패가 아니라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유척(鍮尺)이다. 말 그대로 '놋쇠로 된 자'다. 암행어사는 두 개의 유척을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고 고문하는 데 쓰는 형구의 크기를 확인하는 데 사용했다. 요즘이라면 용납될 수 없는 매질과 고문이 법으로 허락된 조선시대일지라도 형구의 크기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방 관리가 쉽게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가혹한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다른 유척은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징수를 고르게 하는 데 쓰였다. 지방 관리가 제멋대로 됫박을 크게 하거나 자를 작게 해서 곡식과 옷감을 많이 징수한 후 일부를 자신들이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암행어사는 유척을 사용하여 지방관리가 죄인을 법에 따라 다루고 공정하게 세금을 징수하는지 확인하는 일을 했다. 암행어사가 직관으로 지방관리를 탐관오리로 지목하고 "오라를 받아라"라고 외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은 꽤나 합리적인 사회였다. 그 합리성의 근거는 표준화된 단위다.
 
생각해보자. 길이에 표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각자 생각하는 1미터가 다르면 어떠했겠냐는 말이다. 옷감을 사고 파는 데 길이의 의미 자체가 없어진다. 자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길이만 그런 게 아니다. 질량, 시간, 전류량, 온도, 물질량 같은 기준에는 표준이 있어야 한다. 표준은 단지 거래와 세금징수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물리학과 화학, 정보통신,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모두 1875년 국제적인 미터조약이 성립되고, 1889년 국제원기가 제정된 후에야 일어난 일이다. 
 
국제원기는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이 갖고 다니던 유척에 해당한다. 각 나라가 사용하고 있는 1미터와 1킬로그램이 서로 다르지는 않은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야 국가 간의 통상거래에 분란이 없고 세계의 과학기술자들의 연구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그런데 미터조약과 국제원기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과학과 기술은 이제 거꾸로 국제원기를 의심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또 원기의 길이와 무게가 미세하게 변할 가능성이 있다. 그 차이가 적어서 예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측정기술이 좋아져서 그 차이를 알게 되었다. 또 원기가 파손될 가능성도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파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또 아무리 측정기술이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기준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표준이 필요했다. 답은 물리학에서 나왔다. 과학자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상수를 바탕으로 표준을 정하기로 했다.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1초에 299,792,458 미터를 이동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1미터는 299,792,458분의 1초 동안 움직인 거리라고 정했다. 
 
새로운 미터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단위들도 그런 것은 아니다. 킬로그램은 원기 대신 광자의 에너지를 광자의 주파수로 나눈 '플랑크 상수'로 재정의(定義)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고 묻지 마시라. 나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물리학자가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킬로그램원기가 없어도 1킬로그램을 정확히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종이와 연필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키블 저울이라는 정밀한 장치가 필요하다. 어찌할꼬? 걱정마시라. 그래서 우리는 세금을 낸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이미 만들어 놓았다. 
 
조선시대에 정의(正義)를 위해 유척이 필요했다. 현대에는 정의를 위해 물리학이 필요하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penguin1004@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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