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남북경협)현대그룹·경협의 부침
(9)IMF관리체제·미국 대북제재 등 추진 어려움 겪어
입력 : 2018-09-16 06:00:00 수정 : 2018-09-16 06:00:00
[뉴스토마토 채명석 기자]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방북과 김대중 정권의 남북경협(경협) 의지는 한국 경제에 매우 우호적 환경을 조성했고 다른 기업의 북한 진출을 독려했다.
 
1998년 9월 박영화 삼성전자 사장은 중국 베이징에서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아태) 부위원장과 10억달러를 투자해 해주 또는 남포에 50만평 규모의 전자복합단지를 조성하기로 구두 합의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2차 소떼방북 직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주재한 간부회의에서 ‘남북경협위원회’를 가동해 북한에 건설될 경제특구 등에 여러 기업이 참여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논의했다. 그리고 대북사업이 확대될 경우를 대비해 북한과 평양사무소 개설 문제를 논의하고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위해 외국 기업과 국내 기업의 컨소시엄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내외 기업의 대북 진출 분위기는 더 이상 확산되고 발전되지 못했다.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한국의 경제 환경이 최악의 상황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하에서 기업은 고금리, 자금난, 상호 빚보증 해소, 부채 비율 축소, 외채 상환 등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이중과세 방지, 투자보장협정 등 대북 투자에 앞서 선행돼야 할 법적 제도가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늘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가 우선했던 남북 관계의 관성도 재계의 대북 투자를 머뭇거리게 했다. 결국 현대와 더불어 대표적 재벌이었던 삼성은 시기상조라며 경협 참여를 중단했다.
 
당시 경협 추진에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미국의 대북경제제재였다. 1999년 9월 북·미 ‘베를린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를 기대한 현대의 바람과 달리, 미국은 북한산 제품에 대해 일반관세율보다 최고 10배 이상 높은 세율을 적용했고 수출입시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수입하는 제품에 대한 ‘일반특혜관세제도’ 혜택도 주지 않았다. 결국 경협을 통한 북한산 제품은 남한, 중국, 러시아 등 원산지 규정 적용을 받지 않는 시장으로 판로가 국한되었다. 미국의 ‘전략물자 수출 통제 체제’와 ‘수출관리령’에 따른 상무부 ‘수출관리령’은 미국산 부품이나 기술이 10% 이상 포함된 제품을 북한이나 쿠바 등으로 재수출할 경우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를 위반한 기업에 대해서는 미국으로의 수출을 금지하는 제재조치를 규정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산이 북측과 합의한 경협의 일부였던 외국 기업의 직접 참여 및 외자 유치 구상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현대그룹도 IMF 관리 체제하에서 구조조정과 빅딜을 피할 수 없었다. 고선박 해체사업과 압연강재 공장 건설을 담당하기로 한 인천제철과 현대강관은 매각되었다. 빅딜을 통해 현대전자는 반도체 부문을 차지했지만 경협 사업인 통신을 포함한 다른 분야는 LG로 넘어갔다. 즉 구조조정과 빅딜 과정에서 살아남지 못한 현대 계열사가 맡기로 한 경협 부문은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건설업계 불황으로 특히 현대건설의 위기가 심했다는 점이었다. 제3국 건설 공동 진출 장소로 리비아와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결정된 것도 무산되었다.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경협의 중추였던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는 그룹 전체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불러왔다. 아산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2000년 들어 발생한 ‘왕자의 난’ 분쟁도 일시적으로 그룹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병상의 아산이 직접 나서 자신과 2세들의 동반 퇴진을 선언했지만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해  7월 말 현대 계열사의 신용등급 무더기 강등으로 자금 악화설이 다시 퍼지자 정부는 구조조정 차원에서 자동차·중공업 등의 기업분리 단행을 주문하기도 했다.
 
1999년 11월 19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맨 앞쪽)이 금강산 관광 1주년을 맞아 현대 풍악호를 타고 금강산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현대그룹
 
현대그룹 공동회장이자 대북협상에서 실무를 주도한 정몽헌은 경협 확대를 통해 문제를 진화시키고자 했다. 2000년 8월8일 정몽헌은 아산 없이 소떼방북을 다시 진행하여 대북사업에서 현대의 역할을 과시했다. 그러나 현대그룹 내부의 갈등과 위기는 진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룹 차원에서 2001년 이후 자동차 계열을 분리하기로 한 결정이 2000년 8월에 조기 집행되기에 이르렀다.
 
현대자동차의 분리는 현대건설의 위기를 가중시켰다. 현대건설은 2000년 10월말 최종 부도 위기를 넘겼지만 자구 계획 실행이 어려워졌다. 특히 1980년대 후반 이라크 건설공사 미수금 10억 달러 중 회수 가능 금액은 6000만 달러 전쟁 배상금에 불과해서 현대건설의 발목을 잡았다. 아산의 대북사업을 측근에서 보좌했던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아천글로벌코퍼레이션 회장)은 당시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가 ‘음해성 루머’였고 잘못된 시장 평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건설은 결국 아산 사후 2001년 5월, 정몽헌 등 기존 대주주 지분을 제거하고 채권단 출자 전환으로 그룹에서 분리되었다.
 
이 와중에도 현대의 경협은 계속되었다.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사장은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 현대아산의 주주임을 강조하며 경협 공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에 대한 지원은 물론, 수익성이 없다면서 경협 계획에 있던 자동차조립공장 건설 참여도 거부했다. 현대건설 유동성 위기가 현대자동차에게 밀려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경협의 특성상 투자가 이익으로 현실화되기까지의 기간이 오래 걸리고 분단 상황에서 그 과정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정재계나 사회적으로 공유되지 못한 채 경협에 대한 장기적 전망도 사라졌다. 현대의 경협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경협, 특히 초기에는 ‘공공사업’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보호무역이나 유치산업 보호정책이 필요하듯이, 당분간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당국이 풀어야 할 안보 리스크를 기업이 안고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초기 사업에 대한 정부의 보호장치 제공은 필수적이었다. 리스크는 당연히 사업자가 지되 군사 정치적 갈등과 리스크가 해소될 때까지 정부가 금융 지원과 시설 자금을 ‘일정 수준’ 담보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지원제도는 그 한도 내에서의 ‘정경협조’ 또는 ‘정경보완’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간 기업이 주도한 특수한 성격의 경협과 일반 기업정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경협에 대한 정경분리 원칙도 국제정치의 논리에 휘둘리면서 이중적으로 적용했다. 정부는 현대에 경협을 독려하고 현장에서는 언제나 개입했으면서도 정작 자금난에 봉착했을 때는 순수한 시장논리를 적용하면서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현대아산의 자금난으로 결국 개성공단 개발의 1단계 사업인 100만평에 대한 자금 조달, 설계, 감리, 분양 업무 등 사업권은 2002년 12월 한국토지공사로 이관되었다. 기업 주도의 경협을 통한 실리 추구 원칙이 부정되고, 개성공단이 일종의 정부간 개발협력 프로젝트처럼 운영되는 모양이 된 것이다. 금강산 관광의 경우도 정부는 현대에게 북한과 계약 조건을 수정하도록 권고했고 2001년 6월부터 관광대금이 관광객 수에 따라 지불되는 종량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운영자금 문제로 정부는 결국 한국관광공사를 금강산 관광 공동 사업자로 참여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굵직한 경협 사업 추진 등의 성과는 기대한 만큼 국내 정치 개편이나 지지기반 확충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당시의 야당인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현대그룹의 위기 원인을 “무모한 대북 투자 때문”이라고 무차별 공격하는 상황에서 2001년 3월 아산이 사망했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수사부터 강행했다. 그리고 정몽헌은 ‘자살’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대북제재를 강조했다. 도저히 경협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는 환경이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현대그룹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IMF 사태 이후 한화에너지·LG반도체·기아자동차 등 8개 부실기업 인수 과정에서 재무구조가 급격히 악화되면서였다. 그런데 현대건설 부채금액 5조5000억원중, 금강산 관광 투자액은 892억 원(1.61%)에 불과했다. 경영책임 문제와 다른 차원에서, 수치상으로 보면 대북사업이 위기를 불러왔다고 할 수는 없다. 부도의 결정적 원인은 그룹의 금융거래를 끊다시피 한 김영삼 정부의 정치보복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경영이 어려워진 가운데 이라크 미수금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즉 현대그룹의 추락과 현대건설의 부도를 대북사업과 직결시키는 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자료: 실리적 남북경협 - 아산의 탈이념적 구상과 실행, 정태헌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채명석 기자 oricms@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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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명석

재계를 담당하고 있는 채명석 기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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