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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게이션) ‘마녀’, 결국 감독 박훈정의 진화일까
특유의 느린 전개-편집 효과…’마녀’ 위한 맞춤형 연출?
잔혹 수위, 전작 비해 높지만 강력한 액션 상쇄 효과
2018-06-20 12:13:56 2018-06-20 13:32:41
[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충무로 최고 스타 작가 출신’ 박훈정 감독은 한 가지 특별함이 있다. 전작들을 모조리 헤집어 보면 그 특별함은 간단하게 도출된다. 뻔하고 익숙한 스토리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창조해 내는 능력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봤고,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얘기들뿐이다. 하지만 그려낸 만들어 낸 얘기의 색깔에는 분명하게 ‘박훈정’이란 인장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다. 영화 ‘마녀’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박훈정의 전매특허 ‘느린 호흡’ 전개가 어쩌면 그의 색깔을 더욱 짙게 만드는 차별점이란 것에 동화되는 느낌이다. 전작 ‘신세계’와 ‘대호’ 그리고 ‘V.I.P’를 통해 보여 진 그 방식은 이번 ‘마녀’에서 완성에 더욱 가까워졌다. 편집을 통한 몰입감 유도 역시 좀 더 유려해졌다. 느리고 궁금증을 유발하는 그만의 플롯 해법이 ‘마녀’를 위한 맞춤형 연출이란 점을 고심 끝에 찾아낸 듯 하다. 물론 판단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박훈정의 진화로 귀결될지 박훈정의 퇴락이 될지는. 일단 그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 재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녀’는 한 소녀에 대한 얘기다. 기억을 잃은 소녀는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 자식이 없는 노부부에게 입양돼 살아간다. 어느 날 괴한들이 그를 찾아온다. 소녀에게 기억하라고 강요한다. 소녀는 눈물로 호소한다. 자신에게 무엇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괴한들은 소녀를 납치 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주겠단다. ‘누구인지 가르쳐 주겠다’고.
 
소녀의 이름은 자윤(김다미)이다. 10년 전 한 시설에서 의문의 사고가 터진다. 괴한들은 누군가를 때려 죽인다. 한 여자(닥터 백, 조민수)는 괴한들에게 명령한다. ‘머리를 쳐야 한다고’라며 윽박지른다. 그때 한 소녀가 탈출한다. 이 소녀는 숲 속을 달려 한 노부부에게 발견돼 그들과 살게 된다. 이 소녀가 바로 기억을 잃은 그 소녀다.
 
영화 '마녀'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어느 덧 성장한 소녀는 18세가 됐다.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다. 소를 키우며 살고 있지만 소값 폭락으로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다. 친구는 모든 것을 해결할 방법으로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을 권한다. 1등 상금은 5억원.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한다. 소녀를 오디션 과정에서 놀라운 개인기를 선보인다. 그 장면(뒤에 등장한다)을 본 닥터 백은 그 소녀가 10년 전 시설에서 탈출한 ‘그 소녀’임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린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 새하얀 얼굴의 귀여운 외모를 한 남자(최우식)가 ‘마녀 아가씨’라며 자윤에게 아는 채를 한다. 이 남자는 계속해서 자윤의 주변을 맴돈다. 닥터 백과 얼굴에 흉터가 있는 미스터 최(박희순)도 방송을 본 뒤 자윤을 찾아 나선다. 모두가 자윤을 쫓는다. 대체 이 소녀, 아니 자윤. 무슨 비밀을 품고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는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 간다. ‘마녀’는 고즈넉한 시골의 자연 풍광 속 폭풍 전야를 예감케 한 뒤 곧바로 완벽한 잔혹 스토리로 탈바꿈 한다.
 
앞선 언급처럼 ‘마녀’를 첫 오프닝에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단서를 던진다. ‘시설’ ‘소녀’ ‘소년’ 그리고 각종 ‘인체실험’ 이미지가 투영된다. 물론 오프닝일 뿐이다. 기억을 잃은 소녀는 때때로 찾아오는 극심한 두통과 환영에 시달린다. 환영 속 등장 이미지의 조각은 잃어버린 기억의 열쇠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이제 추리를 한다. 소녀의 정체와 닥터 백 그리고 미스터 최 여기에 새하얀 얼굴의 미남자 일명 ‘귀공자’로 불리는 그 사람. 이들 모두가 이 소녀를 쫓는다. 과연 사건은 무엇을 가리키고 또 숨기고 있을까. 예상 가능한 지점이다. 아니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우리는 ‘마녀’가 그리는 세상 속 비밀과 숨은 얘기를.
 
영화 '마녀'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연출을 맡은 박훈정 감독은 익숙한 이 스토리를 위해 몇 가지 트릭을 썼다. 첫 번째 느리고 느린 전반의 호흡이다. 급박한 오프닝 이후 영화는 소녀를 선택한 시골의 일상에 카메라를 들이 댄다. 때론 친구와의 툭탁거림을 통해 느껴지는 10대 소녀의 명랑함까지 담아냈다. ‘마녀’란 제목과 일단 상충되고 배치되는 지점이다. 관객들의 관심을 분산시킨다. 일단은 이 소녀의 길을 따라가게 만든다. 하지만 전반이 조금 넘어간 지점부터 영화는 박훈정 특유의 전매 특허인 피칠갑 액션이 등장한다. 소녀이기에 강력하게 다가온다.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생경한 모습이다. 자극적이기도 하다. 김다미의 무표정한 얼굴은 스토리 전반의 고요함 속에 담긴 비밀을 품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잔혹하고 하드코어적인 면은 옅다. 전작 ‘신세계’나 ‘V.I.P’에서 선보인 핏덩어리 미장센을 능가하는 장면도 여럿 등장하지만 의외다. 현실적이지만 또한 완벽하게 영화적인 액션의 강도가 워낙 높기에 잔혹함의 수위가 오히려 눌러진 느낌마저 든다.
 
소녀이자 여성을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여성주의’ 혹은 ‘주체적 여성’에 대한 진화된 구조의 얘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아니다. 단지 캐릭터가 여자일 뿐이고 제목이에 ‘마녀(女)’가 사용됐을 뿐이다. 그냥 초월적 존재인 한 어린 인간이 ‘소녀’였을 뿐인 얘기이다.
 
영화 '마녀'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마블에 길들여진 국내 관객이 ‘마녀’를 어떻게 받아 들일지는 모르겠다. 설정과 구성 그리고 플롯의 전개 방식이 워낙 익숙하다. 차별점이라면 너무도 익숙한 이 스토리를 감독 스스로가 자신만의 호흡과 편집 그리고 트릭으로 ‘익숙하지 않은 듯’한 또 다른 트릭을 썼단 점이다.
 
‘마녀’는 기획 당시에 총 2편으로 출발했다. 이번 영화는 ‘파트1’이다. 일단 흥행이 먼저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 ‘V.I.P’를 불편해 한 관객이라면 ‘마녀’는 꽤 흥미로울 것이다. ‘신세계’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마녀’는 실망스러울 것이다.
 
영화 '마녀' 스틸. 사진/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마녀’ 다음의 박훈정이 그려낼 얘기는 좀 더 독창적인 세계로 뻗어가길 기대해 본다. 오는 27일 개봉.
 
김재범 기자 kjb517@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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