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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이상화-고다이라 포옹과 한일관계의 미래
2018-02-20 06:00:00 2018-02-20 06:00:00
최한영 정경부 기자
18일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500m 경기장면.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가 올림픽 기록을 경신하며 1위에 오르자 자국 팬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이 때 고다이라는 바로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조에 속한 이상화 선수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이상화는 경기 후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은메달이 확정된 뒤 트랙을 돌며 눈물을 훔치는 그에게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가 다가왔다. 고다이라는 이상화를 격려하며 끌어안았고, 이상화도 웃으며 고다이라의 우승을 축하했다. 국적과 결과를 떠나 스포츠 정신을 보여준 최고의 장면이었다. 여기서만큼은 위안부·독도 영유권 문제를 비롯해 한일 간 해묵은 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의 시선은 좋지 않다. 당분간 나아질 가능성도 적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지도부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이 큰 몫을 한다. 아베 총리는 방한 중이던 지난 9일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위안부 합의는 국가 대 국가의 합의로,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야 한다는 게 국제적 원칙”이라며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최근 도쿄 시내 한복판에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주장하는 전시관도 개설됐다. 일본의 이같은 움직임 속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고려해 과거사와는 투트랙(two-track)으로 접근하겠다”는 문재인정부의 입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와 별개로 많은 이들이 바람직한 한일관계 정립 필요성을 피력한다. 110여 년 전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말한 “아시아의 평화·번영을 위해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보편적인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말도 총론적으로 옳다. 문제는 방법이다.
 
위로부터의 해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안부·독도 문제를 정치권이 제기할 때마다 양국 국민이 발끈하고 자국 지도부를 지지하는 악순환은 지금껏 되풀이되어 왔다. 양국 시민·사회단체를 포함한 밑에서부터의 점진적인 연대가 대안이다. 일본 내 양심적인 세력과의 대화가 큰 물줄기로 이어질 때 지난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과 같은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당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했고, 김 대통령은 일본이 2차세계대전 후 세계평화와 번영에 기여해온 점을 높이 평가했다. 20년 전 양국이 이룩한 성과를 지금 이뤄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일본에도 양심적인 세력은 충분히 있다.
 
이상화·고다이라 선수의 포옹 장면을 놓고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시민적 연민과 우정, 연대”라는 평을 내놨다. 두 선수의 포옹이 바람직한 한일관계 정립을 위한 ‘우연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면 헛된 희망일까.
 
최한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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