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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현의 만인보로 읽는 한국사)⑨"어머니! 저승 가서도 걸레질 실컷 하소!"
여자의 일생
2016-03-07 06:00:00 2016-03-17 17:26:19
 내일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 날의 기원은 1908년 1만50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 투표권 등을 요구하며 뉴욕시를 행진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계기로 1909년 2월28일 미국 사회당의 주도 하에 첫 번째 '전국 여성의 날'이 미국에서 기념됐고, 이후 이 가치지향적 행동은 유럽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 마침내 1975년에는 '세계 여성의 날'이 유엔(UN)에 의해서도 축하받게 된다.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의 문제를 성찰하는 이 기념일에, 우리네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의 삶이 조용히 다가온다.
 
1910년 8월 코펜하겐에서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여성해방 운동가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은 여성의 인권을 요구하기 위해 각국이 매년 같은 날을 '여성의 날'로 기념하자는 제안을 한다. 회의에 참석했던 17개국 100여명이 이 제안에 만장일치로 동의함으로써 '세계 여성의 날'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 제안이 채택된 해로부터 10년 후인 1920년, 우리나라에도 나혜석, 김일엽, 김명순, 박인덕 같은 자유주의적 신여성들과 허정숙, 정칠성 같은 사회주의적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주의 운동가들에 의해 '여성의 날'이 기념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에도 명맥을 유지하던 이 날은 해방 후 오히려 독재정권들에 의해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다시금 대중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신청사 다목적홀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2회 한국여성대회'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3.8 여성선언과 슬로건 발표 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만인보>의 곳곳에는 성차별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여성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한 예가 아들을 못 낳아 '죄인'이 된 여성의 모습이다. "갈메 딸그마니네 집 / 딸 셋 낳고 / 덕순이 / 복순이 / 길순이 셋 낳고 / 이번에도 숯덩이만 달린 딸이라 / 이놈 이름은 딸그마니가 되었구나 / 딸그마니 아버지 홧술 먹고 와서 / 딸만 낳는 년 내쫓아야 한다고 / 산후 조리도 못한 마누라 머리끄덩이 휘어잡고 나가다가 / 삭은 울바자 다 쓰러뜨리고 나서야 / 엉엉엉 우는구나 장관이구나"('딸그마니네', 1권).
 
그러나 딸그마니네는 "기막히게 단" 고추장을 만들 줄 아는 아낙인지라, "남원 순창에서도 고추장 담는 법(을) 배우러" 올 정도이다. 이 시의 백미는 다음의 행들이 그려내는 회화적, 서정적 이미지와 함축적, 은유적 화법, 그리고 유쾌한 해학에 있다. "그 집 알뜰살뜰 장독대 / 고추장독 뚜껑에 / 늦가을 하늘 채우던 고추잠자리 / 그중의 두서너 마리 따로 와서 앉아 있네 / 그 집 고추장은 고추잠자리하고 / 딸그마니 어머니하고 함께 담는다고 / 동네 아낙들 물 길러 와서 입맛 다시며 주고받네 / 그러던 어느 날 뒤안 대밭으로 순철이 어머니 몰래 들어가 / 그 집 고추장 한 대접 떠가다가 / 목물하는 그 집 딸 덕순이 육덕에 탄복하여 / 아이고 순철아 너 동네장가로 덕순이 데려다 살아라 / 세상에 그런 년 흐벅진 년 처음 보았구나"(앞의 시).
 
장독대 위 파란 가을을 투명하게 날아다니는 빨간 고추잠자리, 고추장-고추잠자리-고추(남아)로 이어지는 이미지 연상과 언어유희는 딸그마니네의 고추장맛처럼 시를 감칠맛 나게 만든다. 이러한 회화성, 서정성, 해학성 안에 녹아있는 성차별이라는 사회적 주제는 그것이 단지 슬로건으로 외쳐질 때와는 달리, 예술적 감흥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게 된다. 여기에 '시'의 강점이 있고 <만인보>의 매력이 있다.
 
고은 시인 육필원고 '딸그마니네' 초안. ⓒ고은재단
고은 시인 육필원고 '딸그마니네' 초안. ⓒ고은재단
 
<만인보>가 4001편의 시들로 구성된지라, 한 번 읽고 각각의 시들을 다 기억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가슴의 작용 때문인지 한번 읽고도 기억에 남는 시들이 있는데, 필자에게는 '개사리댁'이 그중 하나이다. "아들 삼형제 떡두꺼비로 길러내고도 / 시집온 이래 / 큰 기침소리 한번 내본 적 없는 개사리댁 / 누가 뭐라고 해도 / 마지못해 한마디 응할 뿐 / 그것도 입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 나온 소리 도로 기어들어가도록 작은 소리 / 그 개사리댁"('개사리댁', 1권). 이쪽저쪽 이웃마을 아낙들 사이에서도 말소리가 가장 작은 사람인 개사리댁은 "며느리한테도 / 잔소리 하나 없이 / 타진 중의적삼 꿰맬 뿐 / 호롱불 끌 때의 숨소리도 누구 들리게 내지 않"는다. "그러던 개사리댁 / 작년부터 시름시름 앓더니 /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게 앓더니 / 다 죽게 되어서야 / 삼형제 방에 모여 임종하는데 / 생전 구변이 있어야지 / 유언 한마디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 장독대 간장독 뚜껑 볕에 열어두라는 한마디 들릴락 말락 하더니 / 또 한마디 / 느이 아버님 옷솜 새로 틀어다 넣어야 할 텐데 하더니 / 그냥 꼴칵 숨넘어갔네"(앞의 시).
 
개사리댁이 우리의 가슴에 남는 것은 아마도 그녀가 들릴락 말락 하게 남긴 유언 두 마디의 내용 때문이리라. 평생 큰 목소리 낼 줄 모르고 자기를 죽인 채 할 일만 하고 살아온 그녀가 임종의 순간에서조차, 지아비와 가족을 위해 자신이 평소에 하던 일을 이제는 누가 할까 하는 심정으로 당부와 걱정을 남기고 가는 모습이 시종여일하다. 이 소박한 '한결같음'에 경의의 갈채를 보내야 할지, 연민의 시선을 보내야 할지는 독자의 몫이다.
 
한편 개사리댁과 비슷한 사람이 원당리에서도 발견된다. "상엿집 돌아 원당리 넘어가면 / 원당리 잔솔밭머리 / 삼덕이네 집 / … / 삼덕이 어머니는 별명이 걸레질이라 / 먼 데 바깥사돈만 왔다 가도 / 그 손님 앉았던 자리 걸레질하고 / 그 손님 다음날도 걸레질하고 / 걸핏하면 여기 더럽다 저기 더럽다 하며 / 방구석이나 마당이나 / 어디 한 군데 할 것 없이 말짱하다 / 동네 거미들 그 집 가서 / 거미줄 칠 생각 말아야지 / 동네 먼지들 그 집 가서 / 눈치코치없이 내려앉을 생각 말아야지"('원당리 삼덕이 어머니', 4권). 거미와 먼지의 구절들이 보여주듯이, 여기서도 역시 고은시인은 해학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밤낮 걸레 들고 일만 하다가 떠난 어머니의 삶은 아들에게 회한이 될 법하다. "그렇게 깨방정맞게 말짱한 집에 / 역신 병마 손님은 용케도 들어와 / 그만! / 삼덕이 어머니 시름시름 앓아누워 / 자리보전으로 한 달 두 달 넘는다 / 자리보전하는 중에도 / 진걸레 마른걸레 손 닿는 데 두었다가 / 서문 밖 의원님 왔다 간 뒤에도 / 그놈의 걸레질인데 / 끝내 세상 떠나고 말았으니 / 큰아들 삼룡이 잔뜩 술 먹고 염할 때 / 걸레 몇 개 관 속에 넣으며 울부짖었다 / 어머니! 저승 가서도 걸레질 실컷 하소!"(앞의 시).
 
고은 시인 육필원고 '원당리 삼덕이 어머니' 초안. ⓒ고은재단
 
기실 일만 하다가 세상을 마감하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던 때라, "옥정골 뒷방네 엉덩이 큰 뒷방네 / 앉으면 가마솥 엎어놓은 뒷방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뒷방네 / 억척으로 / 억척으로 / 날 저무는 줄 모르더니만 / 일하다가 때 되면 / 지레김치 한가닥 똬리 얹어 / 고봉밥 게눈 감추고 일하더니만 / 시름시름 시답지도 않게 몸져눕더니 / 비 뿌린 뒤 / 쌍무지개 맞물려 뜬 것 보며 / 나 일 그만 하라고 데려가려나보다 / 그런 뒤 사흘 나흘 지난 아침 / 두 눈 반 뜨고 죽었다 / 재작년 여읜 딸 머리 풀고 달려와 / 눈 감겨주었다 / 까만 먹손톱 안 깎아도 손톱 자랄 틈 없이 / 일만 한 손이다 / 까만 먹손톱 / 그 손 잡고 / 어메 어메 하고 딸이 울었다 / 동네 아낙네 울었다"('쌍무지개', 4권).
 
그밖에도 <만인보>에는 여성이 상품처럼 팔려가는 결혼문화가 묘사되어 있다. "물동이 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며 / 동네 아이를 보아도 선웃음쳐 반기"고 "동네 노인들 보아도 / 길 비끼며 선웃음쳐 반기"던 쪼까니는 "쓰다달다 한마디 없이 / 옥정골 나락 다섯 가마니"에 "그만 옥정골 고종구 영감 후살이로 넘어"가고 만다. "물 길러 와 / 무턱대고 두레박 내리는 것이 아니라 / 저 아래 고요한 물 한번 내려다보고 / 잘 있었니 / 하던 쪼까니의 선웃음 인사"가 떠난 중뜸 우물물에는 "함박눈 속절없이 떨어져 녹을 뿐"이다('중뜸 쪼까니', 4권).
 
가정폭력도 낯설지 않은 것이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여성이 남성에게 맞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시인은 자신의 집안도 예외로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술 깨면 숫제 맹물하고 형제 아닌 적 없"는 할아버지가 주사를 부릴 때의 경우이다. 장손인 시인에게는 "아가 일본은 우리나라가 아니란다 / 옛날 충무공이 일본놈들 혼내줬단다 기죽지 말어라"('할아버지', 1권), 라고 격려와 함께 민족정신을 북돋워주지만, 시인의 작은고모 야문이가 이질에 걸려 죽었을 때는 어머니에게 "네년이 야문이를 안 먹여 죽였다고 / 약 한첩 못 써 죽었다고 때"리는 식이다('작은고모', 1권). 혹은 “"추석날 아침 / 제사상 물려 밥상 한번 갖가지인데 / 으레 반주에도 지나쳐 / 술 취한 할아버지가 / 병든 할머니 귀퉁방머리를" 치는 식이다('할머니의 울음소리, 1권).
 
'세계 여성의 날'이 시작된 지 100년이 넘게 흘렀지만 식민지 시절이 배경인 이 시들 속의 여성문제는 아직도 많은 부분 현재진행형이다.
 
박성현 고은재단 아카이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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