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퇴직한 김모(59) 씨는 서민의 재산형성을 위해 도입된다는 만능통장,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가입하려고 주거래은행을 찾았다. 은행과 증권사가 다음 달 본격 도입에 맞춰 각종 이벤트와 경품행사를 벌이는데다 추후 ISA를 노후대비 통장으로 이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의를 마친 그는 비참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은행 상담원으로부터 "ISA가 도입되면 직전 연도까지 근로소득·사업소득이 있는 자만 가입할 수 있으므로 회사를 그만둔 퇴직자는 가입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혜택을 받고 싶으면 나 같은 60대도 다시 취업하거나 개인 사업을 해야 한다는 건데 은행과 증권사만 서로 신난 것 같고 오히려 서민은 소외되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ISA는 정부가 '국민의 재산형성을 실질적으로 지원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마련한 세제 혜택 프로그램이다. 가입 대상자는 계좌 하나에 예·적금, 펀드, 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연 2000만원까지 담아 5년간 최대 1억원까지 운용할 수 있다. 5년 만기 인출 때 순수익 200만원까지는 비과세, 200만원 초과 수익은 분리과세로 9.9%(지방세 포함) 세율이 적용된다.
그런데 이러한 통장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입 문턱이 높아 혜택을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입자격에 따르면 퇴직자, 전업주부, 비정규직 근로자, 농어민 등 종잣돈 마련이 절실한 사회 취약계층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천창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은퇴 이후 노후대비가 가장 큰 목적일 텐데 사실 퇴직자나 농어민, 비정규직 근로자 등은 일을 하는 근로자보다 더 취약한 사람들이다"며 "정작 ISA가 필요한 이들이 가입이 제한됐다는 것은 도입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보다 먼저 ISA제도를 도입한 일본과 영국의 가입기준과도 다르다. 영국은 16세 이상은 누구나 ISA 계좌를 개설할 수 있으며 일본은 20세 이상으로 나이 기준을 마련했으나 소득기준을 따로 정해두진 않았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임원은 "ISA는 20대에게는 결혼과 전세자금을 30~40대에게는 주택마련과 자녀교육통장, 50대에게는 노후대비통장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면서도 "5년간 1억원 한도로 부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자에게는 별 장점이 없고 재산형성이 필요한 저소득층이나 퇴직자, 비정규직은 쉽게 가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국민의 만능통장이 '특정계층의 ISA'로 변질됐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신협·우체국·새마을금고에선 ISA 개설 못해
신탁업을 허가받은 금융사에서만 ISA계좌 가입이 가능한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자본시장법상 신탁업 인가를 신청하기 위해선 금전신탁 기준 최소 자본금이 130억원, 종합신탁은 250억원 이상 있어야 한다. 대형 금융회사 대부분이 신탁업 인가를 지니고 있으므로 금융 서비스 혜택이 큰 서울, 수도권 등 주요 도시에 사는 소비자들에겐 큰 불편함이 없을 수 있다.
지방으로 가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골이나 낙후지역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촘촘한 지점망을 갖추고 있는 우체국이나 새마을금고 등은 신탁업 인가가 없어 해당 상품을 판매할 수 없다. 인터넷가입도 가능하다고하지만 지방 거주자들은 기존 거래처에서 ISA 개설을 하지 못하면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다른 금융회사를 찾아 새로운 계좌를 만들어야 한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영국과는 달리 왜 우리만 ISA를 굳이 신탁계좌로 만들어야 하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며 "당국의 이런 처사는 투자자의 금융 상품 선택권을 직접 침해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천창민 연구위원은 "이미 지방 거주자들은 주요 도시 거주자들보다 금융 서비스 혜택에서 소외돼 있는데 ISA 개설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를 받는다면 그들이 느낄 박탈감은 더 클 것"이라며 "되도록 더 많은 금융기관을 ISA 개설 사업자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5년 인출 제한에 서민들 가입꺼려
인출제한 역시 서민들에게는 가입을 꺼리게 하는 제한요인이다. ISA를 도입한 해외에서는 공통으로 인출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 제도의 가장 큰 목적은 '유동성 있는 예비저축'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5년간 의무가입기간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기간 원금과 이자 등의 인출이 제한된다. 다만, 저소득자나 청년층의 경우 기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는 예외 규정을 마련하긴 했다.
아울러 저축자의 사망이나 해외이주, 천재지변, 퇴직, 폐업, 3개월 이상의 입원치료나 요양이 필요한 질병 등 불가피한 경우에는 중도 해지가 가능하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기존 세제 혜택 상품인 재형저축과 소득공제펀드의 의무가입기간을 고려하고 금융자산형성을 일정 기간 강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면서도 "소득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지 않아 돈을 장기간 묻어두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재형저축과 소장펀드가 좋은 취지와 세제 혜택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의무가입기간 때문에 저소득층이 가입을 꺼렸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다. 영국도 ISA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 비과세 특별저축계좌를 도입했지만, 의무가입기간을 설정한 나머지 저소득층의 가입이 부진했다. 전문가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목적이 자산형성이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어떤 저축자산이어야 하는가"라며 "생애주기에 맞게 부족한 퇴직자산을 보충하고 언제든 찾아 쓸 수 있는 예비적 저축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금과 ELS위주로만 가능..주식·채권 안돼
주식과 채권에 직접 투자는 막아두고 위험이 더 큰 지수연계증권(ELS)과 파생결합증권 등 복잡하고 위험한 상품을 포트폴리오에 편입하도록 한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편입 가능한 금융상품의 범위를 매우 광범위하게 설정함으로써 포트폴리오 투자가 가능하도록 설계돼 있다.
반면, 한국 ISA 제도의 편입 가능상품은 예·적금의 은행 관련 금융상품과 펀드 그리고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으로 한정돼 있다. 주식과 채권에 대해서는 직접 투자할 수 없는 셈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저금리 상황서 금리보다 나은 수익률을 제공할 수 있도록 많은 정보와 투자상품을 제공하는 것은 금융사의 몫이다"면서도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한 포트폴리오 투자상품에 노출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명정선 기자 cecilia1023@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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