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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난 해묵은 폐단…대형사 짬짜미에 골판지시장 '휘청'
대형사 5곳이 시장 쥐락펴락, 공급가도 마음대로…"현금 들고 줄서야"
공정위 담합 조사 마무리…과징금 심사보고서에 업계 '초긴장'
2016-02-11 14:23:12 2016-02-11 15:52:18
국내 골판지 시장은 5개 기업이 이끈다. 기본적으로 골판지 시장은 원재료인 원지를 생산하는 '제지사'와 원지를 구매해 골판지를 생산하는 '판지사', 골판지를 구매해 골판지 상자를 재가공하는 '지함소'로 구분된다. 구조대로라면 판지사가 갑, 제지사가 을, 또 다시 지함소가 갑, 판지사가 을이 된다. 골판지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은 지난 2006년을 전후해서다. 이 기간 시장은 활발한 인수합병(M&A)을 거치면서 재편됐다. 제지사 간은 물론 제지사와 판지사 간 인수합병이 이뤄지면서 제지사가 판지사와 지함소를 계열사로 두는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5강 체제가 완성됐다. 문제는 이들이 원지 가격 등 시장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든다는 데 있다. 이들의 담합 앞에 중소 판지업계는 먹이사슬의 약자로 내몰렸다. 자본 논리에 따른 재벌의 갑질 행태가 골판지 시장에서도 '관행'이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복잡하게 얽혀진 골판지 시장을 들여다본다.(편집자)
  
"제지사들 몇곳이 중심이 되다보니 오히려 제지사에 돈을 내고 원지를 구매하는 판지사가 을이 됐어요. 제지사가 원지를 팔지 않으니 원지로 골판지를 만드는 판지사들이 현금을 들고 줄을 서는 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진 거죠."(중소 판지사 ㄱ업체 관계자)
 
"제지사, 판지사를 모두 가지고 있는 대형사들 몇몇이 서로 짜고 원지 가격을 올리면 중소형 판지사들은 인상된 가격을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형사들은 중소형 판지사에 원지를 못 팔아도 계열사(판지사)에 넘기면 되기 때문에 걱정이 없는 거죠. 반면 중소형 판지사들은 원지를 공급받지 못하면 골판지 생산 자체가 안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인상폭을 받아들입니다."(중소 판지사 ㄴ업체 대표)
 
골판지 시장이 자본력을 갖춘 소수의 대형사들 위주로 재편되면서 그 부작용으로 가격담합 폐단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 업체들은 원지 공급권을 쥔 대형사들의 횡포에 휘둘리면서도, 보복이 두려워 번번한 문제 제기조차 어렵다. 
  
제지사로부터 원지를 공급받아 골판지를 생산하고 있는 판지사 내부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11일 공정거래위원회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2012년 골판지 업계 담합 조사에 착수한 지 4년 만에 이달 중으로 결론을 내릴 예정이다. 앞서 골판지 상자 생산의 원재료인 원지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골판지 업체들이 당국에 무더기로 적발됐다. 공정위는 현재 담합 혐의에 대한 조사를 사실상 마무리했다. 이달 중 조사결과 발표와 함께 과징금을 부과한다는 계획이다. 10년 가까이 이어져온 해묵은 담합 관행이 제재 칼날에 놓였다.
 
빅5, 골판지 시장 쥐락펴락…수직계열화로 시장지배력 확대
 
디지털화로 종이 사용이 줄면서 제지업은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분류되지만, 골판지의 경우 사정이 다르다. 농수산물의 골판지 포장이 정착되고, 홈쇼핑과 온라인쇼핑의 성장에 따라 택배산업 또한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리면서 포장에 쓰일 골판지 수요도 급증했다.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지난 2014년 기준 골판지 시장 규모는 3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4년 전과 비교했을 때 1조원가량 대폭 늘었다.
 
성장성이 커지면서 시장에도 지각변동이 일었다. 2006년을 전후에 활발한 인수합병(M&A)이 진행되면서 현재 태림(동일제지(019300)·월산제지·동원제지), 대양(신대양제지(016590)·대양제지(006580)), 아세아(002030)(아세아제지(002310)·아세아페이퍼텍·경산제지), 삼보판지(023600)(대림제지(017650)·고려제지), 수출포장(002200) 등 '빅5'가 공급가를 결정하는 독과점 시장으로 재편됐다.
 
이들 대형사 5곳은 인수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제지사가 판지공장을 거느리는 구조를 갖췄다. 수직계열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업계에서는 이들을 일괄기업으로 통칭한다. 한 법인 내에 골판지 원지, 골판지 및 골판지 상자의 일괄생산 시스템을 갖춘 기업이란 의미다. 원지를 구매해 골판지를 제조하는 판지사는 전문기업으로 일컬어진다.
 
결과적으로 골판지 시장의 대대적인 재편으로 인해 일괄기업의 시장점유율이 확대됐고, 이들은 시장 지배력을 앞세워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했다. 담합이다. 2006년 50%대였던 일괄기업의 시장점유율은 현재 70%를 넘어서는 등 해가 갈수록 지배력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판지사 경영사정 악화…원지가격 인상에도 속수무책
 
일괄기업인 대형사들의 힘이 비대해진 반면 중소 판지사들의 영업 기반은 크게 위축됐다. 한국골판지포장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1990년대 160여곳에 달했던 판지사는 2000년 115곳으로 줄었으며, 2015년 현재 109곳만이 생존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대형 판지사들은 대부분 제지사의 자회사로 인수됐고, 힘없는 소형 판지사들은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판지사들의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남은 판지사들 사정도 위태롭기 짝이 없다. 골판지 상자 생산에 있어 관건은 원재료인 원지의 원활한 수급인데, 원지 공급이 원활치 못할 경우 판지공장 가동 자체가 멈춰서는 일도 발생한다. 원지를 생산, 판지사들에게 공급하는 대형 일괄기업들이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때문에 전문기업들은 원지의 가격인상에도 속수무책이다.
 
제지사로부터 원지를 공급받는 한 전문기업의 원지 평균단가를 산출한 결과, 원지(DW) 1㎡ 기준 가격은 지난 2007년 411원에서 2011년 560원, 2012년 540원으로 계속해서 인상됐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는 일괄기업들의 담합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기간이다. 공정위가 담합 혐의 조사에 들어가면서 원지 가격은 점차 낮아져 올해 1월 기준 판지사들은 제지사로부터 해당 원지를 391원에 구매하고 있다.
 
당국의 조사와 제재 조치가 뒤따를 것으로 예상되면서 시장은 안정세를 되찾았지만 이 같은 카르텔 구조를 깨지 않는 이상 담합은 언제들 재발할 수 있다는 게 판지사들의 우려다.
 
한 중소형 판지사 관계자는 “골판지상자의 제품가격에서 원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70%에서 많게는 90% 까지로 높은 편”이라며 "원지가격이 인상됐다고 골판지상자 가격을 바로 올릴 수 없기 때문에 중간에 낀 판지사만 손해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언제 일괄기업들이 원지 가격을 인상할지 모르니 마음을 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중소형 판지사 대표는 "가격인상에 대한 협의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지만 갑 위치에 있는 제지사는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식"이라며 "그럼에도 가격인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힘의 우위는 약자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다.
 
공정위 제재 눈앞…과징금 1조에 달할 수도
 
현재 공정위가 가격 담합 혐의를 조사하고 있는 골판지 기업은 20여곳으로, 여기에는 일괄기업 계열사와 대형 판지사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한 대형사가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하면서 조사가 진행됐으며, 대형사 5곳 가운데 4곳의 계열사 모두 조사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연매출 3000억원가량의 대형 전문기업도 4곳이 포함됐다는 전언이다. 이들은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원지 및 판지 가격을 담합해 인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과징금 규모도 적지 않다. 현재 시장을 주도하는 빅5는 2~3개의 제지사와 2~4개의 판지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어 이들 모두에게 과징금이 부과될 경우 기업 한 곳당 수천억원의 과징금이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 현행법상 담합관련 매출액의 10%에 해당하는 금액까지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는 계열사들을 포함해 이번 담합 혐의를 받은 기업들의 과징금 규모가 9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해당 기업들은 과징금을 줄이기 위해 원지가격 인하 등 매출액을 낮추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거나, 김앤장 등 대형 로펌에 의뢰해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 준비를 취하고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고 귀띔했다.
 
공정위는 골판지 업계 담합과 관련해 산정된 과징금을 가지고 해당 업체들과 최종 조율 중으로, 그 결과에 따라 이달 안에 전원회의를 열고 조사결과와 함께 과징금 규모를 공표할 예정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이달 중에 (과징금을 확정해)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임효정 기자 emy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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